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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Sep 16. 2021

나는 오늘도 숙성 중이다

길심씨가 굽은 허리로 농사지어 보내준 고구마가 주방 한쪽에서 천대를 받고 있다. 어릴 적 나의 고향 영암에서는 그렇게 환대를 받았던 고구마가 자리를 차지한다고 박스에 담긴 채 나의 발길질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다. 흔하면 귀한 줄을 모른다. 먹을게 넘쳐나고 고구마보다 더 맛있는 게 많으니 나에게도, 애들에게도 환대를 못 받는다. 추운 곳에 두면 썩어 버릴 것이니 베란다로 내놓을 수도 없다.  

   

고구마를 빨리 해치울 심산으로 구워도 보고, 쪄도 보지만 예전 맛이 아니다. 고구마 맛이 변한 게 아니라 내 입맛이 변한 것이다. 저녁에는 돼지등뼈를 푹 고은 다음 묵은 김치를 넣고 감자 대신 고구마 넣어 끓였다. 매운 국물에 고구마를 건져 한입 먹으니 감자와는 달리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상하게 입에 감기는 맛 하나에도 금세 추억 속으로 빠져 들곤 한다. 이것도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인간 숙성의 한 과정이려나.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고구마를 캐는 날엔 먼저 넝쿨을 걷어내고 호미로 흙을 파서 한 두둑씩 캤다. 그 시절엔 집집마다 고구마를 참 많이도 심었었다. 고구마 넝쿨은 잘 말려 작두로 썰어서 겨우내 소의 여물이 되었고, 고구마는 겨우내 사람의 간식이 되거나 더러는 주식이 되기도 했다. 밭에서 집으로 실려 온 고구마는 안방 한쪽 구석의 어리통에 저장을 했다. 어리통은 수숫대나, 대나무를 엮어서 울타리처럼 세워 만든 겨우내 임시방편 방안의 보관창고였다. 고구마는 온도가 낮은 곳에 두면 썩어 버리니 우리 식구와 함께 방에서 한겨울을 난 것이다.    


같은 밭에서, 같은 시기에 수확한 고구마라도 언제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랐다. 추석 전날에 미리 캐온 밑이 덜 든 햇고구마는 유난히 껍질 색깔도 빨갛고 꼬리 부분의 끊어진 부분에서는 하얀 진액이 흘러나왔다. 우리 영암의 빨간 황토 흙이 묻어 있어서 더 싱싱해 보이기도 했다. 가을이 저물기 전 고구마는 아궁이 가마솥 밥 위에 얹어서 뜸까지 들이고 밥을 풀 때쯤 솥뚜껑을 열면 껍질이 갈라져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웃고 었었다. 반으로 쪼개면 반짝반짝 진주처럼 빛이 났다. 먹다 보면 맛있는 밤처럼 보슬보슬한 가루가 떨어질 정도로 밤고구마였다. 그 시절엔 별다른 간식이 없어서 햇밤, 햇고구마, 햇과일 등 햇것을 기다렸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 먹을 수 없었으니까. 그 해에 처음 먹는 거라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엔 기다림이 들어있어서이기도 하다.     


초겨울 어리통에서 꺼내 쪄먹었던 고구마는 밤고구마도 물고구마도 아니었다. 한겨울을 지나고 봄이 멀지 않았을 때에는 꿀이 든 듯 단물이 흐르는 찐득찐득한 물 고구마였다. 숙성기간을 거치면서 더 단맛이 나고 진득해져 갔다. 우리 집은 방에 어리통만 있었지만 앞집 친구네는 식구가 많아 어리통으로도 모자라 마루 밑에 굴을 깊게 파서 고구마를 보관했다. 한겨울을 지나고 친구네서 얻어먹은 고구마는 유독 진득한 단물이 많아 더 맛있었다. 고구마 굴에서 온도와 습도가 맞아 숙성이 잘 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시골의 겨울과 밤은 길고도 길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 온 동네 집집마다의 굴뚝에선 연기가 피워 올랐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밖에서는 소복소복 눈이 쌓여 갔다. 아버지는 잠들기 직전 큰 가마솥에서 온기가 남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죽을 퍼서 마구청(외양간) 돌구유에 가득 채워주고는 한 번 더 아궁이 끝 깊숙이 장작을 모아 군불을 지폈다. 소들도 겨울이면 정성스럽게 끓인 집밥, 소죽을 먹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눈 오는 날이면 솔가지 장작 냄새를 폴폴 날리며 아궁이에 묻어두었던 군고구마를 꺼내 왔다. 저녁 먹은 지 오래되어 출출했던 한밤중에 장독대에서 누런 양은 양푼에 막 퍼 온 얼음덩이가 가득한 동치미는 군고구마와 찰떡궁합이었다. 그렇게 고구마로 배가 불러지고 구들장은 뜨끈뜨끈 끓고 행복한 겨울밤은 깊어만 갔다.    


어리통의 고구마는 숙성기간에 따라 맛이 달랐다. 밤고구마였다가 밤고구마도 물고구마도 아닌 고구마가 되기도 하고, 진득한 물고구마가 되기도 했다. 혹은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악취 풍기는 썩은 고구마가 되기도 했다. 우리네 인생도 밤고구마처럼 빛이 나는 듯이 보이지만 퍽퍽할 때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과도기를 거치기도 하고, 안정이 깃들어 단맛이 배어 나오는 진짜 숙성된 맛을 내기도 한다. 한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서 먹었던 단물 가득 진득한 물고구마처럼 나도 진득한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나는 오늘도 숙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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