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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2. 2021

가을, 다시 슬기로운 시골생활

추석을 맞아 고향집 길심씨네에 왔다. 키가 우뚝 선 맨드라미가 고개를 바짝 세우고 환영인사를 하며 나의 안위를 묻는다. 두어 달 전 슬기로운 시골생활(여름)에서는 작달막한 키로 내려다보며 붉은 닭 볏 같은 꽃을 마주했으나 이제는 당당히 서서 나를 맞이한다. 키 큰  맨드라미가 가을임을 알려준다.



불과 두어 달여 만에 자연은, 시골은 많이 변해 있다. 그 세계에서, 그 일상에 젖어 살 때에는 보이지도 않고,  체감하지도 못 한 것들이  떠나 있다 다시 와보니 그 달라진 것들이 금세 눈에 들어온다. 아직 한낮의 햇볕은 따갑지만 마당 곳곳에서 가을 냄새가 하늘 높이 풀풀 날린다.

 

얼마 전 태풍 찬투의 남해안 관통으로 마당의 대추나무는 겨울인 듯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쓸쓸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열매는 미리 다 떨구어버렸다. 태풍에 제때를 맞추지 못하고 억지로 떨어져 말라가는 대추는 제 빛깔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강한 태풍과 시련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순응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빛깔을 낼밖에. 


한 여름 가뭄에 물을 줘가며 옮겨 심어 힘없이 흙에 누워 맥을 추지 못했던 들깨 모종은 벌써 나와 키재기를 겨룬다. 식물이나 인간이나 시련 없이 한 세상 잘 살아내기는 쉽지 않다. 가뭄을 이겨내고 힘을 길러 자랐더니 태풍이 와서는 이파리를 다 거두어 갔다. 얼마 남지 않은 잎으로 자리를 지키고 소금 같은 흰 꽃을 피우고 있다. 

들깻잎을 따려다 내가

"아이고, 이것이 뭣이당가?"

했더니 길심씨는 

"하나도 딸 것이 없당께. 그래도 으짤 것이냐. 할 수 없제"

시골에서 잘 사는 방법은 자연에 순응하고 잘 맞이하고 그리고 잘 보내는 것일 것이다. 길심씨네 논의 벼도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바닥에 배를 깔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길심씨의 남편, 나의 아버지 성수씨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거를 타고 논으로 향한다. 더 이상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생을 가뭄, 홍수, 태풍 같은 자연재해에 맞서면서도 순응하고 그러면서도 감사하며 산다. 일찍 심어, 일찍 거두어 산봉우리 만큼 높이 쌓인 들깨대에서 수확이 적어도 길심씨는 목청 높여 

"이것만 해도 다행이제." 

한다. 나는 자연에서, 시골생활에서, 길심씨에게서 또 한 수, 고수의 슬기로운 시골 생활을 배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만 또 남아 길심씨네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지고 슬기로운 시골생활(가을), 마을생활 모드로 들어간다. 싸늘한 가을밤바람이 좋은 청정 시골, 호동 마을의 밤은 반딧불이의 불빛과 함께 또 하루가 깊어만 간다. 나를 반겨주던 맨드라미는 마당가에 서서 오늘도 길심씨네를 지키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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