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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3. 2021

또 다른 탄생

영암 읍내의 떡 방앗간에 다녀왔다. 추석도 지나고 무슨 떡 방앗간이냐겠지만 떡이 아니고 고춧가루를 빻기 위해서다. 떡 방앗간에서 쌀가루도 빻아 떡도 하고, 고춧가루도 빻고, 기름도 짠다. 봄부터 심고 가꾼 고추를 여름에 따고 말려 드디어 고춧가루가 새로이 탄생했다. 길심씨의 고춧가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백 번의 발길이, 손길이, 눈길이 닿아 있다. 

호동 마을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건조기가 있어 고추 말리기에 애가 타지는 않는다. 하지만 길심씨네는 애초에 김장도 많이 하지 않아 고추를 적게 심으니 굳이 건조기가 필요 없었다. 있으면 더 좋을 일이다. 많지 않은 양이지만 고추 건조시기가 되면 길심씨네는 번번이 애가 탄다. 햇빛 쨍쨍한 날 열흘은 족히 말려야 하는데 날씨가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 맑기만 할까. 고추 크기도 종자 개량을 통해 예전에 비해 훨씬 커졌으니 말리는 기간도 길어졌다.


두어 달 전 내가 시골살이 중 초벌 고추를 따다 말리는데 비 예보가 있었다. 애가 탄 길심씨는 앞집의 건조기에 좀 넣자고 부탁을 했더랬다. 그런데 다른 집에서 벌써 건조기 사용 예약이 되었지만 공간이 남을 듯하다며 가져오라기에 리어카에 싣고 가져갔지만 이미 공간이 꽉 차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이렇듯 시골에서 건조기 없이 고추 말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 리어카에 다시 싣고 온 고추를 길심씨는 하나하나 일일이 가위로 배를 가르고 펼쳐서 말렸다.


가을, 시골에 다시 오니 고추가 잘 말려져 큰 비닐봉지에 들어있다. 길심씨는 방앗간에 가자고 한다. 딸이 추석 연휴가 지나고도 시골에 머물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이걸 방앗간에 가져가 빻는 일도 큰일이라는 생각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시골 마을마다 노인들뿐이어서 방앗간에서도, 미용실에서도 차가 와서 모셔가고 모셔온단다. 시골 마을의 생활도 어르신들을 위해 발전하고 있다.


길심씨, 성수씨를 태우고 생전 처음으로 고추 방앗간에 들어섰다. 눈도 맵고 재채기가 마구 나온다. 쌀가루 빻듯 고춧가루도 여러 번에 걸쳐 빻은 다음 마지막엔 쿵더쿵 쿵더쿵 방아를 찧어 마무리한다. 봄, 여름 두 계절을 지난 그 고생의 결과물이 비닐봉지 안에 열 근이 담겼다. 그야말로 태양초 고춧가루이다. 집에 오자마자 길심씨는 고춧가루 봉지를 열어 열을 식힌다. 가루가 되어 새로 태어나느라 뜨거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 백 번의 발길, 손길, 눈길이 닿아야 한다. 이제 고춧가루는 또 얼마나 많은 곳에 들어가서 맛을 낼 것인가. 고운 빛깔로 다시 태어난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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