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난희 Oct 16. 2021

농사는 다 힘들어!


"저어기 사프쟁이 ○○네 논은 나락을 다 비었등만. 우리것 모냥 다 쓰러졌는디 벌써 다 비었드랑께. 우리도 빨리 비어야쓰겄어."

아침 운동을 다녀온 성수씨가 야단이다. 태풍에 쓰러진 벼가 점점 더 쓰러지더니 이젠 아예 논바닥에 배를 깔았단다. 비가 오면 큰일이니 빨리 벼를 베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조바심을 낸다. 벼가 쓰러진 누구네 논은 벌써 다 베었다고 우리도 빨리 농협에 연락해서 베어버리자고 길심씨를 닦달한다.


농작업을 대행하는 농협에 맡겼으니 모판에 볍씨 뿌려 모심어주고, 드론으로 농약 쳐주고, 콤바인으로 다 베어 주지만 물꼬를 보고 논둑에 풀 베는 것은 논 주인의 몫이다. 아버지는 지난여름 내내 논둑의 풀을 베고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을 다녀왔다. 흡사 보고 싶은 님이라도 만나러 가는 양이었다. 님이라도 그리 자주 보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길심씨의 말을 빌리자면 논에 벼가 몇 포기가 되는지 아마도 셀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농작물의 수확은 기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예전에 비해 관개시설이 잘 되어 영산강 수로가 지나가 물 걱정은 안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너무 안 와도 병충해 때문에 걱정이다. 태풍이 오면 쓰러질까 밤새 바람소리에 귀 기울인다. 논에 물꼬도 막았다, 열었다 뺄 때, 댈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벼농사는 너무 잘 되면 태풍에 쓰러지기 십상이고 너무 안되면 수확이 적을 수도 있다. 때를 알고 시기를 잘 맞추는 일은 어렵다. 60여 년 경력의 농사꾼도 어쩔 수 없다.    


쌀을 뜻하는 쌀 米 자는 풀어서 88(八十八) 자로  봄에 뿌린 볍씨를 가을이 되어 수확할 때까지 농부의 손길이 여든여덟 번 필요하다니 그 말이 가히 짐작이 간다. 지금은 기계화도 되고 농작업 대행업에 맡겨서 벼농사를 짓는다지만 성수씨의 발길, 손길, 눈길은 여든여덟 번이 아니라 수 백 번도 넘을 것이다. 농부의 손길뿐 만 아니라 정성 어린 관심과 마음은 더 중요하다. 


점점 더 바닥으로 치닫는 벼를 보고 올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수씨는 혼잣말로 혀를 끌끌 차고 애가 탔는데 드디어 이제 며칠 후면 콤바인이 우리 논에 들어간다. 두 노인이 농협에 전화 한 번 걸기도 벅차다. 전화번호 찾느라 옥신각신이다. 내가 나서서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벼가 많이 쓰러져 여차여차하다 설명하니 차례차례 하기는 하지만 날짜를 맞추어 보겠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한다. 아버지는 전화를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오늘만 해도 논농사에 몇 번의 애타는 마음길이 갔다. 


성수씨는 주로 논농사, 길심씨는 밭농사,  나는 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짧은 경력의 글 농사꾼은 마음만 바쁘다. 농사가 어디 하루아침에 되던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던가. 글농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써놓고도 논에 피 뽑듯이 마음에 안 든 글이나 비문은 뽑아내기도 하고, 기계로 모를 심어도 빠진 곳을 찾아내어 또 손으로 심어 때우듯이 나도 글이 빠진 곳을 찾아 그 자리에 다른 글을 찾아 때운다. 글은 쓰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지울 수나 있지 한해 논농사는 마음에 안 든다고 엎고 다시 지을 수는 없다. 그리 보니 힘들기가 부모님의 논농사 짓기보다는 내 글농사 짓기가 더 쉬울려나? 암튼 농사는 다 힘들다. 자식농사도.           




이전 11화 시골 노인 성수씨의 루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