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

by 전난희

논둑에서 고구마 줄기를 따다가 갈치조림으로 이른 저녁을 해 먹었다. 길심씨는

"딸이 밥해 주니 좋다. 딸 가불먼 으짜끄나."

한다. 난 이 말이 좋다. 내가 시골에 머무는 이유가 되니까. 설거지하는 동안 길심씨는 여유 있게 T.V를 본다.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설거지를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아직 어둠이 내려앉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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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듯 얼른 저녁 산책에 나섰다. 어둠이 덮쳐오면 혼자서 걷는 길은 무섭기 때문이다. 마당을 나와 고샅길에 서서 고개를 돌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시골 저녁 풍경은 역시 아름답다. 저 멀리 마을 뒤로 보이는 월출산 자락은 점점 검은 선을 드러내고 있다. 소나무도 한낮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감추기라도 하는 양 검은 실루엣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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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서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동네로 가지 않고 등가래 들녘으로 길을 잡았다. 가을 들판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어 아직 산보다 밝다. 들녘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월출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다른 한쪽은 저무는 회색빛 노을이 월출산과 대치하듯 서 있다. 노을은 금세 어둠에 묻힐 것이고 월출산은 더 검은 실루엣을 드러나며 밤을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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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논 한 배미가 비었다. 콤바인이 다녀갔나 보다. 짚이 논바닥을 덮었다. 다음 주가 지나면 금세 들녘은 비고 또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봄 일은 늘어나고 가을 일은 줄어든단다."

하던 길심씨의 말이 떠오른다. 논에도, 밭에도 해야 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들판이 비고 나면 어느 사이 가을 일은 줄어들고 겨울이 오고 또 한 해가 갈 것이다.

들판 끝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섰다. 가로등이 없는 들판은 나더러 얼른 돌아가라 한다. 문득 누런 큰 어미소에게 풀을 뜯기며 고삐를 잡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른다. 지금도 풀이 수북이 자라는 곳만 보아도 여기서 소 풀을 베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때는 소 풀도 많지 않아서 이리저리 찾아다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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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돌아 나와 동네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를 지나 마을 안 길로 걸음을 옮겼다. 동네 안쪽 골목까지 가다가 혹시 누구라도 만나 나만의 시간이 깨질까 봐 돌아섰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 고샅길을 지나쳐 마을 입구 버스승강 쪽으로 가다가 돌아서고 왔다 갔다 가을 저녁을 마음껏 들이켰다. 집으로 돌아오니 마당가에 앉은 길심씨가 새롭게 돋아나는 별을 하나, 둘 세고 있다.

"아야, 오늘은 별이 많이 안 보인다잉."

무심한 척 하지만 나이 먹은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