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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7. 2021

어따, 성수씨 이제 속 씨연하것다

새벽같이 논에 다녀온 성수씨는 애가 닳아서   

"에이고 참~ 오늘 나락 빌란가 모르것네. 비가 그쳐야 쓰것는디."

한다. 이에 길심씨는 

"그랑께라우. 나도 지내간 밤에 자다 깨서 나가본께 별이 총총해서 비가 올지는 몰랐는디 하느님이 하는 일인디 으짜것이요."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 노부부는 T.V를  크게 켜놓고 일기예보를 기다리며 근심 섞인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2층 다락방에서 비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던 딸은 잠을 깨서 두 노부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호박죽을 쑬게라잉?"

"그래에. 그람 좋제."

"그란디 귀찮으먼 밥 먹어."

"당신이 좋아한께 쑬라고라우."

사뭇 두 분의 대화가 정답다.  그러나 이 부부 사이에도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 많았다. 나이가 깊이 들고 인생의 고개를 같이 넘어서인지 요즘에는 훈풍이 분다. 서로 천둥번개 피하는 기술을 터득하신게다. 


길심씨가 낑낑대며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나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숨죽이고 있다 일어나 따라 나갔다. 늙은 호박과 단호박을 한 통씩 껍질을 벗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호박죽을 쑨다. 장작불을 때다 비땅(부지깽이)을 두들기고 앉아 밖을 보니 비는 벌써 그쳤고 산에서 안개가 내려오며 마당에도 한가득하다. 

"길심씨, 안개가 자욱한 걸 보니 오늘 햇빛 쨍쨍하것네."

하니 길심씨는

"그라먼 좋것다."

한다.


호박죽을 먹고 나니 길심씨는 딸이 내일 간다고 하니 파김치를 담가준다며 파를 한 바구니 뽑아온다. 마당에 나란히 앉아 쪽파를 다듬는데 어느새 논에 다녀온 성수씨는 

"오늘 우리 논부터 나락 빈다능만. 같이 가보세. 얼른 오소잉."

하며 자전거를 타고 쌔앵 나간다.

길심씨는

"아야, 우유에다 더덕 좀 갈아오니라잉."

하며 보행기를 밀며 나간다. 어느새 안개는 벗어져 가고 고운 햇살이 나오고 있다.


나는 길심씨가 밭에서 캐다 놓은 더덕으로 더덕 라테를 만들어 새참으로 가져갔다. 요즘에는 콤바인으로 금세 작업이 끝나서 새참도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무엇이라도 대접해야 한단다. 논에는 농작업을 대행하는 농협에서 직원 세 분이 나와 분주하다. 콤바인으로 작업하는 걸 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만큼 가을걷이 때에 시골에 내려와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겠다. 

성수씨, 길심씨의 벼 이삭줍기(일년간의 수확인데 벼이삭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다.)
곡물적재함에 벼 품종 이름'일미'와 아버지의 이름 쓰여였다.

우리 논에서 난 벼 알곡을 실은 곡물적재함 차 뒤를 따라 길심씨를 차에 태우고 농협으로 갔다. 처음으로 가 본 미곡종합처리장(RPC)은 어마어마했다. 벼 알곡은 건조장으로 들어가고 금세 수분함량과 벼 중량이 전광판에 뜬다. 잠시 기다리니 직원이 수매정산서를 들고 나와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준다. 오늘은 시골에서  신문물을 접한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성수씨는 집안정리를 하고 있다. 길심씨가 수매정산서를 내밀며

"어따, 성수씨 이제 속 시연하것다."

하니 성수씨는 삐긋이 웃는다. 벼 수확하는 날이지만 벼는 농협으로 갔고 집으로 온 건 수매정산서 뿐이다. 예전에 비해 엄청 간단, 편리해졌지만 무언가 허망한 기분은 무얼까? 집에 벼 한 포대도 들어오지 않아서일까? 그래도 일이 줄어서 부모님에게는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태풍에  쓰러진 논의 벼 때문에 비가 올까 봐 며칠 동안 애를 태우며 노심초사하던 울 아버지 성수씨는 오늘 밤은 두 발 쭉 뻗고 주무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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