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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6. 2021

저녁 산책

논둑에서 고구마 줄기를 따다가 갈치조림으로 이른 저녁을 해 먹었다. 길심씨는

"딸이 밥해 주니 좋다. 딸 가불먼 으짜끄나."

한다. 난 이 말이 좋다. 내가 시골에 머무는 이유가 되니까. 설거지하는 동안 길심씨는 여유 있게 T.V를 본다.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설거지를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아직 어둠이 내려앉기 전이다. 


쫓기듯 얼른 저녁 산책에 나섰다. 어둠이 덮쳐오면  혼자서 걷는 길은 무섭기 때문이다. 마당을 나와 고샅길에 서서 고개를 돌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시골 저녁 풍경은 역시 아름답다. 저 멀리 마을 뒤로 보이는 월출산 자락은 점점 검은 선을 드러내고 있다. 소나무도 한낮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감추기라도 하는 양 검은 실루엣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동네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서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동네로 가지 않고 등가래 들녘으로 길을 잡았다. 가을 들판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어 아직 산보다 밝다. 들녘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월출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다른 한쪽은 저무는 회색빛 노을이 월출산과 대치하듯 서 있다. 노을은 금세 어둠에 묻힐 것이고 월출산은 더 검은 실루엣을 드러나며 밤을 지킬 것이다.

어느새 논 한 배미가 비었다. 콤바인이 다녀갔나 보다. 짚이 논바닥을 덮었다. 다음 주가 지나면 금세 들녘은 비고 또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봄 일은 늘어나고 가을 일은 줄어든단다."

하던 길심씨의 말이 떠오른다. 논에도, 밭에도 해야 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들판이 비고 나면 어느 사이 가을 일은 줄어들고 겨울이 오고 또 한 해가 갈 것이다.

들판 끝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섰다. 가로등이 없는 들판은 나더러 얼른 돌아가라 한다. 문득 누런 큰 어미소에게 풀을 뜯기며 고삐를 잡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른다. 지금도 풀이 수북이 자라는 곳만 보아도 여기서 소 풀을 베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때는 소 풀도 많지 않아서 이리저리 찾아다녔었다.


들판을 돌아 나와 동네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를 지나 마을 안 길로 걸음을 옮겼다. 동네 안쪽 골목까지 가다가 혹시 누구라도 만나 나만의 시간이 깨질까 봐 돌아섰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 고샅길을 지나쳐 마을 입구 버스승강 쪽으로 가다가 돌아서고 왔다 갔다 가을 저녁을 마음껏 들이켰다. 집으로 돌아오니 마당가에 앉은 길심씨가 새롭게 돋아나는 별을 하나, 둘  세고 있다.

"아야, 오늘은 별이 많이 안 보인다잉."

무심한 척 하지만 나이 먹은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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