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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Oct 27. 2023

분명 쓴맛이 나는데  쓰지 않다는 고(苦)들빼기 김치

"더 넣을까?"

"괜찮은 것 같은데?"

"좀 쓰지?"

두 살 터울  언니인  김여사와  나, 그리고  엄마, 세 모녀의 이야기이다.

통통 튀는 가을볕을  피해  그늘진  수돗가에서 김여사는 갖은양념을  넣고, 통을 들이대고 김치가  담긴 통을 치워가며  종종거린다. 나는 둥그런  깔개에  엉덩이를  앉히고  벌건  고춧가루  양념을  치덕치덕  바르느라 스며든 가을볕과 느닷없이 올라온 갱년기 화마에  땀이 맺힌다.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며  마지못해  이끌려 나온듯한  엄마도 의자에  앉아 간을  보느라  입가에  붉은 고춧가루가  묻었다. 


예전에  엄마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혼자 거뜬하게  해내던  일이었다. 그런데 김여사와 나는 벌건 고춧가루를  앞자락에 묻혀가며  간 보고 또 간을 본다. 간보다  김치를  다 먹을 태세다. 고춧가루를  더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싱겁지 않아? 멸치젓을  더  넣을까? 확신이 없어  절절매다가  엄마  입에  한입 넣어드리고 표정을  살핀다.

"응, 됐다!"

고들빼기 담는  비법을  사사하는  전수자들을 향해 엄마는 흡족한  미소를  띤다. 하지만  되바라진  딸들은  다시 한  먹어보고 정말  됐음을 자신들의 입으로 확인한 후 그제야  통에  담았다.


이제 겨우 시골살이  초년생, 시골 시계는 똥구멍을 쫓아다닌다며 허덕이는 김여사는 그래도  어릴 적  먹어본  입맛이  생각났는지 사흘 전 텃밭에  자생한 고들빼기 사진을  보내왔다. 고들빼기김치를 담아보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김여사는 깔끔 대장이다. 그래서 함께  모여  일을 치르는  날이면 김여사는 재료 다듬기와 뒷설겆이를  담당한다. 그날도  우리가  시골에  내려갈 때에  맞춰  고들빼기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김장 무를 솎아  깨끗하게  씻어놓고 대기 중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을 하는 거침없는 힘을 담당한다. 요리에도 용기가 필요한데  나는 처음 하는 요리에  자신 없어하는 김여사 앞에서는 더욱  용기백배해진다. 그래서 김여사와 나는 아웅다웅하면서도 필요한 곳을 찾아 다시 만난다.


엄마와  같은  마을  정착한  김여사는 엄마만이  만들 수 있는 고추장, 된장, 간장과 김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손맛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손맛이라는 게  쉽게  배워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고추장 2회 차, 메주 쒀서  장 담기 1회 차를 마친 김여사는 자꾸자꾸  엄마를  앉혀놓고 자문을  받아야  안심이  된다. 김장도  마찬가지, 4~5년 차이지만 소금 간할 때도  커다란 고무통이  서너 개 펼쳐진  마당에 엄마를 앉혀놓고   이 정도  소금 지르면  될까요? 묻고  또 묻는다. 아직도 엄마의  손맛을  배워가는 중, 시늉을  내는  중, 여전히  비법을 사사하는 중이다.


150킬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김여사네  마당에  오직  이 집  마당을  향해  태양이  떠오른다는 듯 강렬한 빛이  내려 다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달리느라 피곤하셨을 엄마는 편안하게  쉬실 수 있게  자리를 봐드리고  우리  자매는  김치거리에 소금을  질러놓고 점심을  먹었다. 아침도  굶고  달려  내려온 시장기가 시래기된장국, 가지나물, 여린 고추멸치조림 시골밥상을 먹고 꿀꺽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찹쌀죽 쑤기로  시작한  김치 담기는 오후 세시 반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엄마와 김여사 그리고  나 이렇게  , 통이  아홉 개, 분명  비빌 때는  그득했는데  나누고  보니  딸막딸막하다. 그래도  든든하다.

무김치, 고들빼기, 깍두기 3종세트, 든든하다


어릴 적  먹어보았던  음식은  연어의 물살을  거스른 회귀처럼  나이 든 아웅다웅 자매의 입맛을 동하게 한다. 아주 오래전, 확독에 고추 마늘 생강을 넣고, 오른손은 절구공이의 오목한 부분을, 왼손은 끝을 감싸고 빙글빙글 돌려가며 빻았더랬다. 거기에 항아리에서 푹 삭아 가시만 남은 멸치젓갈을 체에 받쳐 넣고  한 사흘 우려낸  고들빼기를 버무렸었다. 마지막으로 꼭 가을에 수확한 참깨를 볶아 손바닥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비벼서 흩뿌려서 기다란 고들빼기  한 개  집어 올려  크게  벌린 입으로 꿀꺽, 거기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무쇠솥밥 한 숟가락이면...  아웅다웅자매는 거친  물살을  가르며  고향에  닿은  연어처럼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고들빼기김치를  담았다.


고들빼기는 쓴맛이 난다. 사흘을  찬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내야 한다. 우려낸  고들빼기에  소금 간을 해서  숨이  죽으면  양념에  버무린다. 고들빼기김치는  양념타박을  한다. 깍두기나 무김치와 달리  멸치젓을  조금 강하게, 단맛도  조금 더  가미한다. 쪽파랑 같이 버무려 담으면  더  맛깔난다. 게미가 있다. 엄마의 고들빼기김치 비법이다.

 하지만  어린 입맛에는  쓴 것은  쓴맛 그대로였다.  귀한 손님 오면  내놓는다던  항아리 속 고들빼기김치는  사촌형부가  무척  좋아했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도  덩달아 군침을  흘리게 먹는  모습에  한 젓가락  입에  넣었지만  속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촌형부처럼 희끗희끗한 머리가  된  우리에게도  멸치젓갈과 버무린  고들빼기김치가 쓴데 쓰지 않다! 게미가 있다! 잘 삭은  멸치젓갈과  붉은 고춧가루양념 옷을  입은  고들빼기는 씹을수록  쌉싸름한  맛은  사라지고 은근한 단맛이  느껴진다. 이상한 일이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온 집, 나는 칭찬을 고대하는 아이처럼 식탁 위에 통 세 개를 펼쳐놓고 무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데 자꾸 고들빼기김치에 대해서 물었다.

"어때? 쓰지?"

"아니 안 쓴데?"

"맛있어?"

"안 써 맛있어!"

우리는 쓴맛 뒤  찾아오는 은근히 배어나오는 단맛을  알게 된 인생 오십년차이다.



 고들빼기에는 인삼의 대표적인 성분이라고 알려진 사포닌과 이눌린 및  비타민A, 단백질, 베타카로틴, 비타민 B1, B2, B6, C, E, 등과 식이섬유, 아연, 엽산, 인, 철분, 칼륨, 칼슘등의 풍부한 비타민과 영양소 등을 고루 함유하고 있어 혈관건강, 당뇨개선, 골다공증 예방, 장기능 개선, 피부미용, 항암작용, 소화촉진, 간건강, 염증배출, 빈혈개선, 이뇨작용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 게미(개미)가 있다

 :개미(게미)는 전라도 음식 맛을 표현하는 최상의 말로 입안에 착착 감기는 깊고 감칠맛 나는 미각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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