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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Nov 02. 2021

근대 사상으로서의 한용운의 불교


-“서구 근대에 대항하는 원리로서 항상 지식인 사이에서 의식된 것은 불교로서,

근대 사상사는 불교를 빼고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사상사의 외곽에 특수한 영역으로서 불교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사의 중핵으로 다른 사상과 능동적으로 교류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에키 후미히코, 『근대일본과 불교』, 이태승·권서용 옮김, 그린비, 2009, p.231.-

 

 

한용운의 불교 이해에 영향을 미친 량치차오에게서 불교는 근대에 재발명된 ‘신종교’였다.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불교를 중국의 종교로 선택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종래의 불교에 가해졌던 비판들, 가령 미신이라거나 염세적이라는 등의 내용을 거부하면서 불교가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문명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종교라고 본다. 량치차오의 이러한 관점은 불교를 통한 근대화의 가능성을 만해에게 열어준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양계초에 대한 언급이 5번 나온다. 당시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근대적인 체험이었는데 이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개화운동의 실천의 일부로 중요시되었다

량치차오는 1903년 2월부터 1904년 2월까지 『신민총보』에 「근세 최고 철학자 칸트의 학설」을 4회 연재한다.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은 1902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 한용운이 읽은 판본은 1905년 6월과 11월에 초간본을 증보하여 간행한 『중편음빙실문집』과 『분류정교음빙실문집』이다. 「근세 최고 철학자 칸트의 학설」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에 수록된다.

량치차오식으로 전유된 칸트는 한용운의 사상에도 흔적을 남기는데 이 점은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의 「불교의 성질」 편에서 확인된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가 다 내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본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정한 자아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생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서 있음을 보게 된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한용운은 불교의 성질을 칸트의 초월철학을 전유한 자유의 문제로 해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용운에 대한 지성사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하거나 “그 귀결점은 전통적인 반려애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는 평가와 다른 접근을 시도하겠다.

권보드래, 이선이가 대표하는 문화사적 접근의 요점은 한용운의 시를 ‘연애의 시대’의 자유연애론에 대한 백래시로서 전근대적(동아시아적) ‘반려애’로 수렴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시에서 불교적 ‘인과율’을 “동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닌 전통”의 원리로 해석한 것은 ‘근대 사상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누락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용운의 도덕적 우위를 ‘옛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소박한 인과율 이해와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근대사상으로 정초하려 한 동아시아 근대 전환기 지성의 한 전형인 한용운의 구체성은 간과할 수 없다. 한용운은 량치차오를 매개로 하여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한편 불교 사상을 통해서 칸트 철학을 개조하려 하고 있다.

 

“이에 비겨 주자의 명덕설 같은 것은 (...) 이 명덕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며,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겨 미흡한 점이다.”

 

위의 인용은 성리학에 비해 칸트가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을 명료하게 한 점에 주목한다. 칸트의 자연필연성에 속박된 현상적 자아와 자유로운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량치차오-한용운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지식인은 불교에서의 무명과 진아의 구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칸트 철학이 “존재 영역에 대한 이분법적 조망” 즉 “이 경계 설정을 통해서 인간적 실천의 당위성”을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과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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