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작가©기이해 | 오늘의 소설 1
칼라이스는 오늘도 강아지 세미와 산책을 나간다. 아펠 부인은 여행을 떠나기 전 칼라이스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아펠 부인이 퇴직 기념으로 일주일 정도 스위스로 여행을 가 있는 동안 그 집 강아지 세미를 돌봐주고 하루 한 번 산책시키는 것과 현관문 옆에 허리까지 자란 해바라기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칼라이스는 아펠 부인의 집 3층 다락방에 살고 있다. 아펠 부인은 표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갈 곳 없는 칼라이스에게 잠시 동안 그곳에서 살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 주었다. 이 곳에 더부살이를 한 지 이제 6개월 째다. 아펠 부인은 칼라이스가 이렇게 오랫동안 이 집에 머물지 몰랐다. 고작해야 3개월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그래도 이렇게 며칠 집을 비울 때에 지인들에게 여행 가 있는 동안 소포를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한다던지 정원의 꽃에 물을 주는 허드렛일을 맡기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칼라이스가 세미와 산책한 지 이틀 째 되는 날이다. 칼라이스는 세미와 함께 산책하기 전 현관 옆에 자리 잡은 해바라기의 상태를 살펴본다. 이른 아침 목이 마른 해바라기는 어느새 고개가 꺾여있다.
큰일이네, 어서 물을 줘야겠어!
칼라이스는 세미를 잠시 묶어두고 혼잣말을 했다.
칼라이스는 아펠 부인이 여행 가기 전 새로 장만해 둔 호스를 얼른 연결했다. 칼라이스는 해바라기에게 물을 주며 또 혼잣말을 한다.
해바라기야! 잘 자라라.
무럭무럭 자라서 아펠 부인이 오기 전까지 조금 더 키가 커지렴.
그리고는 목이 꺾인 해바라기와 옆에 있는 다른 해바라기 줄기를 함께 손으로 잡아 3층 자신의 방에서 가지고 온 긴 줄로 꺾인 해바라기 줄기를 함께 세워 차분히 묶었다.
칼라이스는 문고리에 묶어 두었던 세미의 목줄을 손으로 옮겨 잡고 집 앞에 길게 늘어선 강 옆의 산책로로 향했다. 15분쯤 걸어왔을까... 칼라이스가 갑자기 키가 2m쯤 되는 만병초* 앞에 멈춰 섰다. 마침 세미가 풀 냄새를 맡으려 멈춰 섰기 때문이었지만 칼라이스 역시 이 곳에서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만병초 (Yellow-flower rosebay: 진달래과)
만병초 앞에는 잔디와 제법 자란 잡초들도 듬성듬성 보였다. 들풀과 들꽃도 보였다. 세미가 도망가지 않도록 목줄의 손잡이는 꽉 잡고 있었지만 목줄은 느슨했고 세미가 자유롭게 주변을 다니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칼라이스는 눈 앞에 있는 크고 작은 꽃들을 살펴보았다. 만병초는 보통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구분되는데 꽃이 피어있는 꽃나무에는 대개 같은 색의 꽃이 무리를 지어 산다. 그런데 이 식물은 이상했다. 꽃나무 대부분이 노란색이었는데 단 한 가지에 피어난 꽃 만 노란 꽃송이 안에 분홍색 꽃 한 개가 피어있었다.
새미 이것 좀 봐!
신기하게 생긴 꽃이네. 하며 또 혼잣말을 했다.
칼라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 앞에 들풀과 들꽃들을 바라봤다. 이 작은 꽃들은 어째서 이렇게 밟히기 쉬운 들판에 피어있는 걸까? 그리고 여기 키가 큰 칸나는 어째서 이렇게 화려하지? 하며 생각했다.
사실 칼라이스는 들에 핀 꽃을 바라보며 자신이 들꽃이나 들풀 같다고 생각했다. 집과 차가 있는 보통의 또래 친구들과 달리 아직도 아펠 부인의 집에 얹혀사는 자신을 생각해 보니 스스로 너무 초라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키가 큰 칸나처럼 살아가는 꽃의 기분은 어떨까? 칸나는 들꽃처럼 사람들에게 밟힐 위험도 없고 키가 크니까 함부로 꺾이지도 않을 텐데. 나도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는 화려하고 키가 큰 꽃이 되고 싶어.
칼라이스는 그 날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고 세미와 함께 산책하며 만난 꽃 들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에 적었다. 일주일은 금방 흘렀고 아펠 부인의 해바라기도 다행히 무럭무럭 잘 자랐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펠 부인은 자신이 무척 아끼는 해바라기도 세미도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느꼈다. 집을 비운 동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했고 안심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칼라이스가 언제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펠 부인은 10년 전 이혼했고 3명 중 2명의 자녀들을 결혼시켰다. 막내딸은 내년에 결혼 예정이지만 모두 출가했다. 이 집은 아펠 부인 혼자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동안 그녀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칼라이스가 이 집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군가 칼라이스의 거취에 대해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칼라이스에게 단지 몇 개월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6개월 이상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칼라이스는 사실 몇 개월 전부터 이미 아펠 부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칼라이스가 이 곳에 살고 있는 동안 자신이 아펠 부인의 삶을 방해하고 있으며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현실은 어두웠다. 칼라이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살았고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가 되었고 노인을 돌보았고 정원도 가꿨다. 어느 날은 청소부도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달이 더 지나고 아펠 부인은 더 이상 칼라이스가 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칼라이스가 녹초가 되어 돌아온 어느 저녁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아펠 부인은 그녀와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칼라이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음 달부터 막내딸 결혼 준비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너무 많고 앞으로 너의 길을 찾아갔으면 좋겠어. 사실 나는 네가 6개월 이상 이 곳에 머물게 될지 정말 몰랐거든.
아, 네...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보고 있었어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다는 거 알아요. 머물 곳이 구해지는 대로 바로 말씀드릴게요.
방으로 올라온 칼라이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이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젤에 사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전화해 봤지만 이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친구가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이스에게는 도움을 요청할 가족도 없었다.
정해진 곳은 없지만 곧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정리했고 남은 것은 큰 트렁크 하나, 작은 사이즈의 트렁크 하나, 중요한 서류가 든 어깨에 매는 가방 한 개, 그리고 필요한 가재도구 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담았는데도 이렇게 많다. 이 모든 것이 꼭 칼라이스의 삶의 무게 같았다. 어디에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지고 다닐 수도 없는 것 들이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참 많기도 하다.
이 많은 것을 가지고 난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칼라이스는 꾸려진 짐들을 보며 또 혼자 중얼거렸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