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랭이 Jan 29. 2024

양산형 이야기 AI로봇이 된 아빠

이야기로 육아하는 27개월 초보 아빠

지난밤 악몽과 개꿈을 반복하며 감기와 싸우느라 잠을 통 제대로 자지 못했다. 06시 30분에 일어났지만 움직일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고민하는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침대의 승리다.


얼마나 잤을까, 매트 위를 밟고 지나가는 쩍쩍거리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잉~"


하은이다. 아침에 일어나 옆 자리에 내가 없으면 방으로 자주 찾아온다. 귀여운 목소리에 잠이 깬 나는 아이를 환하게 맞아주었다.


"잘 잤어? 하은아?"

"네, 잘 잤어요"


어느새 침대로 올라온 하은이는 아빠 옆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아~ 좋아요! 아빠, 아기상어 이야기 해주세요."


감기 때문인지 갈라지는 목소리 때문에 말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잠깐만', '나중에'라는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사용해 기분 좋은 아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옛날 옛날 어느 날 바닷속에 아기 회색상어가 상고 있었대~ 그런데 신나게 헤엄을 치던 아기상어가 어부아저씨가 쳐 놓은 그물에 그만 갇히고 말았대. 그런데"

"나, 하은이, 상어가, 나타났대. 그래서, 하은이 상어랑, 아빠상어랑, 할머니 상어랑, 모~~~~~두 나와서. 구해줬대."

"아, 맞아 하은이 상어가 와서 어떻게 했다고?"

"응, 하은이 상어가 아빠상어랑, 같이, 구해줬대"

"맞아 하은아, 하은이 상어 덕분에 아기상어가 그물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대. 그래서 아기상어랑 상어가족들은 행복하게~"

"살. 아씨. 답. 니. 다"


아이와 함께 만든 아침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났다. 갈라진 목소리에 공복이라 하은이 이름 부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아이가 좋아하니 그걸로 됐...


"아빠, 하은이 상어 이야기 해주세요"

"응? 아... 옛날옛날에 하은이 상어가 살고 있었대, 그런데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던 하은이 상어가 그만 그물에 갇히고 말았대. '어떡하지? 어떡하지?' 걱정하고 있는데, 누가 나타났..."

"아빠샹어랑, 엄마샹어랑, 할비샹어랑, 할미샹어랑, 삼촌샹어랑 모두모두 나타나서, 얍얍얍얍얍얍얍 해서 구했대"

"그래 맞아, 하은아 ~ 상어가족이 나타나서 모두 구해줬대. 덕분에 하은이 상어랑 상어가족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렇게 두 번째 이야기도 무사히 마쳤다. 마치 플레이스토어 속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받아보면 이 게임이 저 게임 같고 저 게임이 이 게임 같은 양산형 이야기로봇이 된 것 마냥 비슷한 내용에 주인공만 바꿔가며 이야기를 생산해 내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스토리 라인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듯했다. 없던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없던 배경에 나무나 돌멩이 같은 것들이 조금씩 채워지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감정표현도 조금씩 늘려나갔고,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면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아빠, 엄마,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채워나가고 있었...


"아빠, 물고기 이야기 해주세요"

"!!!"

이제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그 단어를 꺼낼 때가 되었다. 최대한 불쌍하게 말하기로 했다. 삑사리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하은이 아빠가 목이 너무 아야아야 해서,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줄게. 하은이가 아빠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어?"

평소 같으면 "좋아요~!" 하면서 썰을 하나 풀어주는데, 오늘은 쉽지가 않다. 내 눈앞에 고장 10cm 정도 떨어진 채로 사슴 같은 눈을 하며 나보다 더 불쌍한 표정을 짓는 하은이가 "아빠... 아빠가 이야기해 주세요..."라며 쐐기를 박았다.


졌다...


"하은아, 옛날옛날에 물고기가 살고 있었대. 물고기는 바닷속을 헤엄치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그만! 그물에 걸리고 말았대."

"물고기야 위험해! 물고기야!"

"맞아 물고기가 위험해져서 '어떡하지'하고 있는데"

"얍얍, 나는 하은이 상어다! 내가 도와줄게"

.

.

.

.

사실 그물에 갇힌 물고기는 갇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제일 불쌍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침대 속에 갇힌 '나'라는 사실.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하은이를 보며 이것저것 생각을 참 많이 한다.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할 법도 한대 사실 그건 어른들 기준이고, 아이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는 걸까. 심리나 육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마 아빠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싶다.


아침이면 30분도...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아빠, 엄마. 어린이집에 갔다가 돌아오면 설거지하느라 빨래 개느라, 청소하느라 같이 놀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게 현실이다. 조금 더 보고 싶고 조금 더 안아주고 싶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어른들은 심심하면 유튜브라도 틀지... 자기 명의로 된 스마트폰도 없는 27개월 꼬꼬마는 오죽할까.


이래서 육아는 '양보다 질이다'라는 말을 하는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나는 오늘도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양산하고 있다. '관리가능'한 수준의 스토리 라인으로 구독자의 수요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구독자의 수준이 올라가면 나의 양산현 이야기도 결국 탈로 나고 말겠지만 우선은 버텨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아이가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은이는 알까?


내가 하은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https://brunch.co.kr/@kiii-reng-ee/172


매거진의 이전글 바닷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27개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