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 주임님 잘 지내시죠! 일단 상황 보시면 이 분이 제일 급한 환자인 것 같습니다."
지난 3년간 같은 팀, 같은 서에서 근무했던 선배였다. 구급차 옆 슬라이딩 도어가 완전히 열리기 전 차에서 내리고 있는 선배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다른 서에 근무하게 되어 언제나 보려나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친 것도 참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우선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현장에서 구급대장 역할을 수행하게 될 선임구급대원인 주임님께 상황보고를 시작했다. "주임님, 차 대 오토바이 사고로 보행자 1명까지 치게 된 사고입니다. 구조대상자 총 6명이고 3명은 차량에 있습니다. 지금 이 환자가 제일 급하고 뒤 쪽에 중년 남성이 두부출혈이 심하고, 감각은 있는데, 경추 또는 척추 골절도 의심됩니다."
"어어~ 땡큐땡큐"
다수 사상 사고의 구급대장이 된 주임님은 현장 장악을 시작했다. 우선 제일 급한 10대 남성에게 구급대원을 붙였고, 뒤따라온 펌뷸런스 대원에게 명령했다.
"김대원! 저기 뒤쪽에 우리 직원이 말한 분이 누워 계셔! 응급처치 좀 해줘!"
(블랙박스)현장을 발견하고 차를 대러 가는 상황
펌뷸런스는 앰뷸런스와 소방펌프차의 합성어로 10여 년 전 다양한 응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방에 도입되었다. 화재를 주로 담당하는 소방펌프차 대원들이 펌프차를 타고 출동하여 단순 응급 처치부터 심폐소생술 같은 처치를 하는 것이다. 이는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이나 관내 구급차 공백이 발생했을 경우 그 활용도가 매우 높다.
구급가방을 들고 뛰어오는 펌뷸런스 대원을 도와 중년남성의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경추보호대를 씌우고 출혈부위 소독을 도왔다. 곧이어 두 번째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는 구급대원들을 현장으로 안내했다. 중년의 남성은 구급대가 가지고 온 들 것에 이동시켰다. 연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때마다 환자의 보호자도 애가 타들어갔다.
그제야 땅에 눕다시피 앉아 있는 남성을 응급처치 하기 시작했다. 발가락이 짓눌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구급대원들은 서로 소통하며 침착하게 환자를 처치해 이송을 준비했다.
나는 이제 빠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사복을 입고 현장을 어슬렁거려 봐야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알리 없는 대원들에게는 그저 신원미상의 남성에 불과한 것이다.
'아... 하루 진짜 기네...'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간도 더 지나가고 있었다. 계곡에서 집까지 불과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 아내가 사오러던 빵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 시민이 내게 그제야 소화기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에게 "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차로 이동했다. 하마터면 빈 통이 되어버릴 소화기가 가득 채워져 있어 다행이다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땀범벅이 된 등을 운전석 시트에 기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출발이 쉽게 되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한껏 긴장했던 호흡을 가라앉히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니 어이없게도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눈은 보고 있는데, 생각은 현장에 가 있으니 빵을 살 생각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내 차에 구급상자라도 있었으면 더 빠르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화재진압대원이 아니라 구급대원이었더라면 구조대상자를 더 빠르게 평가하고 응급처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까 그 아저씨는 괜찮으실까?'
'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괜찮을까?'
이런저런 아쉬운 마음과 감정들이 뒤섞이니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미련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룸미러를 조정하게 했다. 잘 조정된 룸미러는 사고현장을 다시 한번 비춰주었다. 그리고 괜히 다짐을 하기 시작했다.
'평생 다시는 없을 상황이겠지만 다음에 내가 또 겪는다면 지금보다 백배 더 나아져 있어야 해! 오늘을 절대 있지 말자!!!'
이제 좀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며 고작 100m도 안 되는 집을 향해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띠. 띠. 띠. 띠. 띠리릭"
현관문을 열자 만삭의 아내가 허리를 잡고 서 있었다.
"랭아! 그, 그 뒤에 교통사고 난 거 그거 갔다 온 거지?"
"아~ 응 봤어? 많이 늦었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라서.. 좀 오래 걸렸네..."
"안 그래도 큰 소리도 나고 사이렌 소리도 들리고, 아까 전화하다가 거기 본 것 같아서 나도 계단에서 봤지"
빵순이 아내는 다행히 빵의 부재를 잊은 듯했고 '다행'이었다. 적어도 샤워를 하고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출출해진 내가 트리거를 당겨버리고 말았다. "아~ 배가 사알~ 고프네", "그러게 나도.. 아! 빵!"
"사 올게.. 쏘리~"
식량을 구하러 가는 나를 아내는 꼭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빵은 됐어~ 고생했어 랭이~ 앞으로 그런 현장에 가도 조심히 해야 해 알겠지? 얼른 씻고 쉬어"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몇 시간 동안 빨갛게 흥분해 있던 감정의 세포들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