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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Mar 17. 2024

삭제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저장하기, 불러오기, 삭제하기

 '분하다...  내가 얼마나 많이 준비하고 연구했는데... 이대로 끝낼 순 없어!'

 나는 메뉴 버튼을 누른 후 '불러오기'를 클릭했다. 일본 게임회사인 'KOEI'에서 만든 '삼국지' 시리즈 중 하나인 '삼국지 영걸전'이라는 게임이다. 동네 서점에서 게임 잡지 한 권을 구매했는데 이 게임이 수록되어 있 해 보니 딱 내 스타일이었다.

 즘이야 검색만 하면 거의 모든 게임의 전략들이 분석되어있지만, 당시는 간단한 매뉴얼만 있을 뿐, 구체적인 전략 책자는 따로 없었다. 전략이 없다는 것은 유저가 직접 실험적인  플레이를 해서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다소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특히, 이런 게임을 할 때는 게임 내용을 저장하는 시점도 상당히 중요하다. 저장을 해 놓고 문제가 될 경우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장도 방법이 있다. 위기 상황 직전에 게임을 저장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만약 패배할 경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계별로 조금씩 저장을 하며 진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다 막히거나 패배하면 원하는 시점으로 불러오면 그만이다.

 런 스토리형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두고 어떤 사람은 스릴이 없어 재미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게임이 상당히 재밌었다. 지는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확신. 무형의 사이버 세상에서는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 결과와 변수를 조작할 수 있다. 내가 손대는 것은 무조건 승리고 만다.

 "게임 만하고 책 좀 봐라. 책 좀! 숙제 다했나?" 게임 속 신 놀음을 하던 남자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다. 게임 속 캐릭터들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밥도 먹어야 되고, 세수도 해야 되고, 공부도 해야 된다. 그리고... 실패도 해야 된다.

 현실 속 패배에 대한 대가는 너무도 참혹하다. '매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변화시킨다'는 각론 너무 늦게 배워버렸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졸면 대학이 바뀐다느니, 와이프 얼굴이 바뀐다느니 하며 우릴 꼬셨지만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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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9시...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서 퇴근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퇴근길 중간 즈음 가면 번화가가 눈에 들어온다. 밤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의 화려한 조명의 간판들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나만 없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내가 그들 옆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뱃속 '꼬르륵' 거리는 소리는 오직 나에게만 들려온다.

 30분만 더 걸어가면 집에 도착하지만, 지질하게도 삼겹살 식당 앞을 지나갔다. 지글지글 거리는 기름 튀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도 언젠가는 삼겹살에 쌈장 가득 발라 쌈에 가득 싸서 먹을 테다!'

 인생의 꽃이라는 시기인 20대, 그것도 한참 무르익을 나이인 20대 후반에 고액의 카드 빛과 3 금융권 부채로 뚜벅이 신세가 된 나의 독백이었다. 분명 계산대로라면 지금쯤 장사의 신이 되어 당당하게 뻗어나가고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창문 없는 원룸을 회사에서 제공받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회사 점심을 제외하고는 식사의 기회마저 사라지니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모자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진짜 모(毛)자람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스트레스와 영양부족, 선천적 유전자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두피를 가득 덮고 있던 모(毛)들이 매일 한 움큼 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월급날 통장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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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게 다시 기회가 있을까. 눈 한 번 찔끔 감았다가 뜨면 내가 저장해 두었던 순간으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혹시 지금 이 세상은 나만 모르고 있고 세상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허구의 세상이지 않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화배우 '짐캐리'주연의 「트루먼쇼(1998)」처럼 세트장이지 않을까? 내가 처한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상상뿐이었다. 밤마다 이런 상상을 하며 잠을 청해보아도 매정하게도 아침은 계속 밝아왔다.

 결국 불러오기가 안 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바로 삭제하기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사람들을 모두 삭제하는 것이다. 휴대폰을 바꾸고, 연락처를 지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SNS까지 끊고 나니, 더 이상 과거가 떠오를 틈이 없었고, 일에 더 집중하고 현재를 바쁘게 살아가니 과거의 옅은 기억은 점점 끊어져 갔다. 

 그런데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한다고 해도 절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호흡 문제다. 일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몰아쉬고, 질식의 고통을 매 분 매 시간 느껴야 하는 고통은 끝날 줄을 몰랐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이 지독한 고통은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삶이 나아지면 자연스럽게 이 문제도 해결될 줄 알았다. 


스포일러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다이내믹한 결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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