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것도 아니다.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고, 피곤하면 몸을 누일 곳이 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당연한 것들이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고, 없으면 불편하다. 당연한 일상의 부재에 따른 고통은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중 폐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이 '호흡'은 필요에 의해서 찾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당연히 자동(?)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이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기 시작했다. 때는 약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여 년 전 어느 날 출퇴근 용으로 샀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잘 서 있는 나무를 크게 박는 사고를 겪었다. 꽤 정면으로 부딪히는 바람에 안면부와 흉부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뇌출혈과 함께 안면, 턱, 안와가 골절되었고, 흉부 전체에 걸쳐 모세혈관들이 터져 바람만 스쳐도 따끔거렸다. 이 사고로 아버지는 차를 사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병원비로 지출해야만 했다. 그 덕분에 클래식한 직물시트와 농기계 감성이 살아있는 수동 스틱, 꽤 괜찮은 연비에 무(無) 파워 핸들까지 장착한 소형해치백 기아 아벨라(1994)는 폐차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다.
아벨라 1994(출처 : 한국일보 기사)
아버지는 늘 '평범한 삶'을 강조했었다. “너무 뛰어날 필요 없다. 그냥 남들처럼 직장 가지고, 남들처럼 가정꾸리고 하면 된다. 그냥...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거다.” 나는 늘 이 말을 들으면 화가 났었다. 겉으로는 “네, 아빠...”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평범한 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남들보다 뛰어나고, 성공해야지. 평범하게만 살면 뭐가 좋지?'라며 아버지의 말씀을 늘 부정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그리 평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병원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창가 쪽에 배정받은 나는 말씀을 아예 못하실 정도의 환자분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아무리 젊어도 그런 병원의 분위기는 나를 압도했고, 어딘가 모르게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다행인 것은 모두가 간병인을 요하는 환자분들이라 간병인 이모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모님들은 보호자 없이 꼼짝도 못 하는 나를 옆에서 많이도 도와주셨다. 며칠이 지나자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답게 이모님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었다. 즐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잠깐이라도 즐겁지 않으면 이 몇 평 안 되는 공간에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퇴원이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퇴원은 입원보다 두려웠다. 심판의 시간은 점점 나의 목을 죄여 오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나셨을 아버지이지만, 그나마 아픈 몸을 하고 있어 병원에서는 혼이 덜 났었다. 하지만 퇴원을 하는 순간 나를 보호하던 방탄유리는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라는 게 나의 계산이었다.
모일 모시에 퇴원을 했다.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만 나가 있을까', 그러나 나의 귀여운(?) 전략은 상상으로만 끝났다. 주치의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간 햇빛을 쬐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외출 통제를 당한(?) 나는 이제 히키코모리가 되어갔다. 전문용어로는 폐인이다.
곰팡이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 내 방 크기만큼 내 세상도 점점 좁혀 나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지 정도만 고민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무엇을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래를 그리고 꿈을 펼칠 용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밤늦게 잠을 청하기 위해 딱딱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으면 감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떠올리기 싫은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뇌신경을 타고 눈앞에 펼쳐지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소리도 더욱 쉽게 들리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물로 받은 침대는 이제 180이 넘는 거구의 청년이 눕기에는 너무도 비좁았다. 매트리스 한쪽 스프링은 이미 터져버린 지 오래다. 예민해지는 신경에 부정적인 이미지, 떠오르기 싫은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른다. 잠들기 전 10분이 나에겐 가장 어둡고 두려운 시간이다. 그날도 역시 그러한 것들을 감내하며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폐 속으로 숨을 100%를 들이마셔야 하는데, 30%만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계곡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빴다.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 기도나 식도에 무언가 걸린 것만 같았다.
빼내야 한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가슴을 힘차게 두드렸다. 아직 아물지 않은 흉부 내 모세혈관 손상 때문에 따끔거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아무리 아파도 숨이 안 쉬어지는 것보다는 낫다. 과호흡과 흉부 타격을 계속 반복했지만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곧 죽겠다 싶을 때 즈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방에 공기가 없나?', 행여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가 보았다. 두 팔을 벌려 "흐~~~ 읍! 하............"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렇게 몇 차례 시도 끝에 다행히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젖은 이마를 툭툭 치는데 갑자기 다시 숨이 막혔다. 처음에 성공한 대로 크게 숨을 들이마셔 내뱉었다. '(1초... 2초... 3초... 4초...) 뭐야 또?' 가슴팍에 뭔가 큰 돌멩이 가 들어가 있는 기분이 또 시작되었다. 입 속으로 손을 짚어넣어 꺼내고 싶었다. 이제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헛구역질과 함께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두 시간 같은 20여 분이 그렇게 지나갔다. 질식의 고통을 느끼며 무서운 생각도 들었지만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20여 분이 20여 년을 괴롭힐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지옥 같은 하루도 잠을 청하면 어느 정도 잊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사람은 자는 동안 그날받았던 나쁜 스트레스들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고 한다. 삐그덕 거리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데 호흡곤란 증상은 처음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누워서 갈비뼈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손으로 가슴을 쳤다. 누워있으니 너무 고통스러워 몸을 앉힌 후 숨을 몰아 쉬었다. 움직일 때마다 눈치 없는 침대는 계속 삐그덕 거리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결국 호흡곤란 첫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날이 밝아오자 야간근무를 마친 아버지가 퇴근해 집으로 오셨다. 밤을 새운 아들 녀석을 보면 화를 내실게 분명했다. 나는 방금 일어난 것처럼 메소드 연기를 시작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를 드렸다. "다녀오셨어요~?" 그리고 다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고,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지쳐 쓰러지듯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10분 정도는 호흡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다시 숨이 가빠왔다. 증상도 점점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해져 갔다.
특히 호흡곤란으로 생활 전반이 점점 망가져 갔다. 밥을 먹다가 숨이 안 쉬어지고 답답하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하는데 그때마다 음식물이 기도를 자주 건드려 식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걸어 다닐 때도 숨을 몰아쉬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야 했다. 걸음은 절대 한 번에 걷지 못하고 몇 걸음에 한 번은 꼭 서서 몸을 비틀어 숨을 몰아 쉰 후 걸어야 했다. 누가 보면 혼자 90년대 댄스곡 '현진영 GO, 진영 GO'의 댄스를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랭이 GO, 키랭 GO'(?)
이제 막 퇴원해서 조용히 지내며 자숙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자신이 싫었다. 늘 눈치 보며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존감 제로였다. 하지만 목숨이 직결될 수 있는 문제고 하니 부모님께 용기 내어 말씀드리기로 했다. 먼저 상대적으로 편한 어머니에게 접근했다. “엄마... 나... 숨이 좀 안 쉬어져.”, “그게 무슨 말이고?”, “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몰아쉬게 돼. 잠을 못 자... 병원에 가볼까?”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역시나 불편했다. 아버지 모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 한 번 가봐라” 어머니가 대답했다.
통원치료를 위해 입원을 했던 병원을 가는 날, 호흡이 불편한 것을 말씀드렸다. 진료 전에는 사고 당시 부딪혔던 흉부 쪽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진료를 하기도 전에 교수님은 잘라 말씀하셨다. '그런 충격으로 이런 증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슬쩍 겁이 났다. "아 우선 다른 과에서 검사를 해 봅시다." 교수님이 말했다.
그리고 대략적인 검사결과가 나왔다. <이상 없음, 원인을 알 수 없음> 생각했던 것보다 '이상 없다'는 결과를 받아 드니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 반대로 '원인을 알 수 없다'라고 하니, 혹시 난치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생겼다.
교수님은 답답해하고 있는 네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음... 저희가 검사한 바로는 크게 이상이 없는데요... 그렇다면... 신경... 정신과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네? 정신과요?"
당시 정신과는 취업 전에 절대 가면 안 된다고 알고 있었다. 정신과에 진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신분상 불이 이익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말도 안 되는 허언이다.
정신과 진료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터널 속에 갇혀버린 내 인생을 더욱 가둬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