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소설
그래도 생일 아침은 먹어야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어제 사놓은 레토르트 미역국을 냄비에 부었다. 출근하려면 시간이 얼마 없으니 조금만 먹어야지. 전기밥솥을 열었더니 밥이 한 톨도 없다. 왜 밥이 있다고 생각했지? 혼자 있으니 밥을 언제 해 먹었는지 헷갈린다. 냉장고를 열었다. 쌀을 넣어두는 페트병도 텅 비었다. 애먼 미역국만 잘 끓고 있다.
미역국만 몇 숟가락 퍼 먹고 집을 나섰다. 조금 늦을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다행히 마을버스가 일찍 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눈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누군가 뒤꿈치를 밟아 신발이 벗겨졌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팍 주었다. 반쯤 나온 발을 다시 신발에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급하게 지하철을 향해 돌진했지만 한 사람도 탈 공간이 없다. 쌀쌀한 바람을 뱉으며 스크린 도어가 닫혔다.
“신입이가 이제 오네.”
사무실 당도한 순간 툭 내뱉은 과장의 말이 뒤통수를 친다.
‘자기도 늦었으면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대리가 부른다. 한 숨 돌릴 틈도 없다. 공유방의 문서를 출력해달라고 한다. 얼른 컴퓨터를 켜고 출력을 날렸다. 삐삐삐 경고음이 OA룸에서 울린다. 드르륵 프린터의 트레이를 열었더니 복사용지가 한 장도 없다. 여분의 종이도 보이지 않는다.
“회사 들어온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용지 주문하는 곳도 모르냐.”
대리가 귀에 대고 조용히 갈군다. 이 쪼그만 회사에 들어와 지금까지 용지가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모를 수밖에. 안 가르쳐줘 모른다고 하면 바로 ‘회사가 학교냐 뭘 가르쳐 주게’라는 레퍼토리를 또 읊었을 게 뻔하다.
점심을 정신없이 먹고 사무실로 오는 길에 전화가 울린다. 아빠다. 그래도 자식 생일을 챙기는 가족이 제일이다.
“오늘 언제 내려올 거야?”
생일상을 상상하며 살짝 애교를 섞어 대답한다.
“왜? 오늘 무슨 날이야?”
“무슨 날은 증조부님 제사잖아. 와서 전 구워야지.”
“뭐? 제사?”
음력으로 돌아오는 제삿날들을 문신으로 새겨놔도 까먹을 것 같은데 아빠는 당신 자식 생일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다. 아빠가 시술대 위에 누워 있고 팔뚝 위에는 ‘조부 3월 2일’, ‘증조부 5월 16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동 바늘이 지잉 소리를 내며 ‘증조모 11월..’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 바빠 못가!”
“야 그럼 네 엄마만 고생고생 음식 해야겠냐?”
‘빌어먹을 그러면 아빠가 하든가.’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당신은 평생 집안일을 하나도 안 하면서 엄마를 위하는 척하는 가증스러움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엄마가 커다란 프라이팬의 기름을 아빠의 팔뚝에 붓는다. 지글지글 피부가 끓으면서 문신으로 새긴 제삿날들이 뭉뚱그려지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못 가요. 오늘 야근이에요.”
말이 씨가 되었다. 야근을 했다. 그나마 늦은 퇴근길 지하철은 한산했다. 노곤함에 기운이 빠졌다. 폰을 들여다보았다. 페이스북을 열었다. 페이스북은 친구들의 생일을 잘도 알려주던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남긴 페친이 1도 없다. 지겨운 야근 동안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보았던 달 사진을 찍어서 올렸지만 ‘좋아요’가 1도 없다. 사진 잘 나오는 폰으로 바꾸고 싶었다.
어두운 현관에 들어서 불을 켰다. 침대에 털썩 앉아 멍하니 방을 둘러보았다. 슬리퍼 한 짝이 현관 턱 위로 올라가 있다. 가스 밸브가 세로로 열려 있다. 쌀을 안 사 왔다. 미역국을 냄비째 냉장고에 넣었다. 집에 와도 반가운 게 1도 없다. 인스타그램에 차고 넘치는 고양이도 없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팍 주고 양말을 눌렀다. 발을 양말에서 주욱 빼내며 털래털래 침대로 돌아오는데 폰의 신호음이 울리며 화면이 밝아졌다. 메시지 아이콘에 알림 ‘1’이 떠 있다. 터치, 열었다.
‘고객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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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을 냅다 벽으로 던져버리려다가 베개에 툭 던졌다. 폰 화면의 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