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없기에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든, 또는 그냥저냥 식상한 영화라도
과거 OTT 영화 담당자로서 지난 영화를 돌아보며 가볍게 읽을만한 글로 소통합니다.
3월 15일 아카데미 시상식을 맞이하여, 2018년 작품상에 빛나는 '셰이프 오브 워터'를 꺼내봅니다.
가장 차갑고 습한 시대, 가장 기이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납니다. 언어의 장벽도, 종(種)의 차이도 뛰어넘어 서로에게 온전히 스며든 두 결핍된 존재들의 이야기, 1962년 냉전 시대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합니다.
★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 4관왕
◎ 감독 / 장르 : 기예르모 델 토로 /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 주연 : 샐리 호킨스(엘라이자 역), 마이클 섀넌(스트릭랜드 역), 더그 존스(괴생명체 역), 리차드 젠킨스
◎ 개봉일 / 관객수 : 2018년 2월 22일 / 약 50만 명
◎ 스트리밍 : 디즈니+, 웨이브, 왓챠 등
◎ 한 줄 평 :
"그대의 모양을 알 수 없으나, 내 곁은 온통 그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핍된 존재들이 물처럼 스며들어 완성한, 어른들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잔혹 동화.
※ 아카데미가 사랑한 이 영화는 단순한 괴수 로맨스를 넘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성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등 주류에서 밀려난 '소외된 자'들의 연대를 아름답고 기괴하게 그려낸 걸작입니다.
'Shape Of Water', 직역하면 물의 모양입니다.
저는 공대 출신(!)으로서 여기서 '모양'이라는 것을 물리적인 형태가 아닌 물이 가진 성격과 특성으로 넓게 해석하여, 인간의 '사랑'과 비교해 봅니다.
① 결합의 마법 (화합물)
물: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화합물로, 상온에서 기체인 두 원소의 성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액체 물질이 됩니다.
사랑: 나와 네가 만나 결합하면, 각자가 혼자일 때 보여주던 특성과는 사뭇 다른 놀랍고 새로운 차원의 앙상블을 만들어냅니다.
② 끓어오르는 에너지 (수소 결합)
물: 단단한 수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온도를 높이거나 상태를 바꾸는 데 다른 화합물보다 매우 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 굳게 맺어진 두 사람을 떼어 놓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 불가피한 이별이 강요될 때, 남녀는 죽음과도 같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③ 차갑게 식어버린 관계 (밀도 변화)
물: 상온에서 액체인 물은 0도 이하로 떨어져 얼음이 되면, 오히려 밀도가 낮아져 물 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사랑: 사랑이 식어버리면 이전보다 훨씬 냉랭하고 딱딱해지며, 수면 위를 겉도는 얼음처럼 깃털같이 가벼운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④ 찌릿한 스파크의 조건 (전도성)
물: 100% 순수한 증류수(물)는 전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미네랄 같은 불순물이 섞여야 비로소 짜릿한 전류가 흐르죠.
사랑: 갈등 하나 없는 순백의 완벽한 사랑은 정체되기 마련입니다. 오해와 다툼이라는 '불순물'이 섞이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사랑은 더욱 찌릿하게 공고해집니다.
⑤ 생존의 절대 조건 (구성 비율)
물: 우리 인체와 지구 구성 물질의 70%를 차지하며, 인간이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최장 시간은 고작 18일입니다.
사랑: 우리 삶의 70% 이상 역시 사랑과 관계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람과의 따뜻한 유대 없이 팍팍한 세상을 버텨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⑥ 정해지지 않은 형태 (비정형성)
물: 액체인 물은 고정된 형태가 없으며, 담는 용기에 따라 그 모양이 결정됩니다.
사랑: 사랑의 빛깔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담고 있는 사람(그릇)의 모양에 따라 사랑의 양상도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⑦ 모든 것을 품는 포용력 (용해도)
물: 극성 분자인 물은 다른 물질을 아주 잘 녹이는 성질이 있으며, 온도가 올라갈수록 그 용해도(녹이는 힘)는 더욱 커집니다.
사랑: 사랑에 빠지면 주변의 어떤 방해물이나 편견도 사랑 속에 녹아 사라집니다. 사랑의 온도가 뜨거울수록 둘을 포용하고 세상을 녹여내는 힘은 강해집니다.
⑧ 세상 모든 것의 척도 (절대 기준)
물: 섭씨온도는 물의 어는점을 0, 끓는점을 100으로 나눈 값이며, 무게 1g과 밀도의 기준 역시 물입니다.
사랑: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결국 사랑을 하기 위해, 그리고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⑨ 생명 탄생의 기원 (우주 탐사)
물: 우주 탐사 시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하고 손쉬운 방법은 바로 '물의 흔적'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의 존재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상징하는 그 자체입니다.
⑩ 영원한 순환 (정화와 유지)
물: 지구는 물이 순환하면서 자신을 청소하고, 생명체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며 기온을 유지합니다.
사랑: 당신은 부모님 사랑의 결과물이고, 당신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의 자식도 사랑을 이어갑니다. 이 위대한 사랑의 순환 속에서 인류는 유지됩니다.
이 영화는 냉전 체제로 미·소가 팽팽하게 대립하던 1960년대. 소통되지 않는 타자는 곧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던 이분법적이고 잔인한 시대를 배경으로, 철저히 배제된 '마이너리티(소수자)'들이 극을 이끌고 갑니다.
수화로 소통하는 작고 볼품없는 '장애'를 가진 '여성' 엘라이자, 그녀의 직장 동료인 '흑인' 친구, '동성애자'임에 틀림없는 화가, 그리고 한눈에 봐도 우리와 다른 생명체임이 확실한 실험 대상 '양서류 생명체'까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의 공식인 '아름다운 여성과 매력적인 남성', 그리고 '달콤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 멘트' 하나 없이도 이 영화는 관객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십니다.
주인공 엘라이자는 전형적 미인이 아니며, 양서류 생명체는 수컷인지 암컷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둘은 입 밖으로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 없죠. 보기에 따라 징그럽다고 느낄 수 있는(물론 탄탄한 몸매를 보며 운동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은...) 이질적인 존재와의 로맨스. 만약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본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영화 중반 이후, 우리가 이 낯선 로맨스에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가는 이유는 소통을 거부하는 악역을 사이에 두고, 위기 속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를 이해하며 바라보는 '절실한 눈빛' 때문일 것입니다. 그 눈빛을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두 존재의 몸짓만으로도 우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요.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 엘라이자 에스포지토
소통을 위한 SNS가 늘 우리 곁을 강물처럼 흐르고 있지만, 진정한 소통은 피상적인 근황 공유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와 따뜻한 연민에서 출발한다는 식상하지만 묵직한 진리를 던집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편 가르고 차별하는 이기적인 현시대에 이 영화가 던지는 따뜻함은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 강렬합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불완전하다고 느껴지나요? 그가 나를 위해 변하기를 원하시나요?
이 영화의 엘라이자처럼,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십시오. 물처럼 스며드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니까요.
✅ 이런 분들에게 강력 추천 (O)
◎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인 미장센에 취하고 싶다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다크 판타지 요소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청록색(물과 생명의 색)'의 매혹적인 색감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 뻔한 로맨스가 지겨운 '감성파'
언어 없이 오직 눈빛과 몸짓만으로 서로를 구원하는 두 주인공의 교감은, 그 어떤 로맨스 영화의 대사보다 훨씬 더 짙고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 소수자와 약자들의 연대에 가슴이 뛰는 분
사회에서 투명 인간 취급받던 장애인, 흑인, 성소수자가 힘을 합쳐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과정은 진한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 이런 분들은 패스하세요 (X)
◎ "인간과 괴물의 사랑? 징그럽고 이해 안 돼!" (현실주의자)
비늘 덮인 양서류 인간과의 로맨스나 다소 수위 높은 베드신, 피가 튀는 잔혹한 묘사들이 있어 현실적이고 깔끔한 멜로를 원하시는 분들에겐 진입 장벽이 높을 수 있습니다.
◎ 동화적인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분
결말이 열린 해석을 낳으며 아름답게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 과정이 꽤나 폭력적이고 우울한 톤을 띠고 있어 맘 편히 웃고 즐길 수 있는 가족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 이미지 출처
① 포스터 : 나무 위키
② 영화 장면 : https://brunch.co.kr/@01d79c8a00b54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