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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병기 Jun 26. 2019

<서부전선>,<태극기 휘날리며> - 동족상잔의 비극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 그로부터 3년 후 1953 7월 27일에 휴전이 됩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현재까지 휴전 중입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부전선'이라함은 전쟁시 대치하는 서쪽의 전선을 말합니다. 주로 한반도에서의 '서부전선'은...


서부전선 : 1953년 휴전 이후 서해 5도에서 강원도 경계선까지의 휴전선


을 일컫습니다. 

한반도를 반으로 두동강 내버린 잔인하고도 서러운 현실을 이야기한다 하겠습니다. 


오늘은 6월 25일, 6.25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볼까요? 3년간이나 지속된 전쟁이니만큼 책 한권으로도 모자른 이야기이지만 간단한 키워드로 7개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1.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40분



많은 수의 병사가 휴가를 가고 무방비 상태로 있던 주말 새벽 4시 40분 북한의 ※남침으로 3년간의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해 그보다 훨씬 긴 현재에까지 한국 현대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반도 최악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 남침

'남침'은 남'을' 침략했다는 의미이지 남'이' 침략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헷갈리신다면 덩침을 기억하세요. (손가락이) 덩꼬를 침략한 것이지 덩꼬가 (손가락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꼭 기억하세요. 김일성의 적화 통일 야욕으로 남한을 침략하며 6.25전쟁라는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 아시죠? ^^ 




괴뢰군 돌연 남침을 기도 38선 전역에 비상사태, 정예국군 적을 요격중
- 1950년 6월 26일 동아일보 1면 헤드라인 -


그리고 그 하단의 기사는...


"(전략) 저들이 불법 남침할 때 이를 포착 섬멸할 수 있는 준비와 태세가 구비되었으니 전국민은 안심하고 국부적 전황에 특히 동요되지 말라.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추호라도 후방의 치안이나 민심을 교란하는 자가 있다면 이 또한 엄중히 단속할 것이니...(하략)'"


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
- 1950년 6월 27일 동아일보 1면 헤드라인 -

라며 국군의 용맹과 전과를 자랑하고!


다음날 28일 서울은 함락(응?), 동아일보는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 10월까지 휴간됩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6월 26일 전쟁 발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제가 기사를 작성해본다면 아래와 같겠죠. 




북한군의 불법 남침, 국군의 대반격


지난 새벽 4시 40분 38선을 내려와 북한군의 불법 남침을 개시하는 교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미 만전의 태세를 갖춘 국군은 당황치 않고 이에 적절히 대응하며 휴전선 근방에서 전투를 벌이며 전선을 사수하고 있다. 국군 고위 당직자에 따르면 곧 북한군은 국군의 공격에 전면적인 패주가 예상되며 동해안에서는 이미 북한군의 2개 부대가 투항했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승만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라고 전제하며 평시와 같이 집무하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불법 도발한 북한군을 이번 기회에 철저히 응징하여 이를 계기로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또한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서 이를 용납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일부 세력의 유언비어 및 선동에 동요 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생업에 종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최종병기 기자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기였습니다. 


2. 개전 3일 만에 서울 함락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 1950년 6월 28일 라디오 방송 -


그리고 곧... 서울이 함락 되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6월 27일 새벽 2시 서울을 빠져나가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

라는 참모의 건의에 대전까지 올라옵니다. 


6월 27일 밤에는 대전으로 도망친 이승만이 녹음한 음성을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으로 꾸며 국군이 선전하고 있으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단결하라는 메세지를 라디오로 반복해서 방송합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국방부 장관 등 정부 당직자는 국군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자신들만 서울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6월 28일 새벽 아무런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리를 건너 피난하던 최소 800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당시 6~8시간의 여유가 있음에도 조기 폭파하여 시민들을 사망케한 것은 납득할 수 없었던 일로 오죽하면 당시 국군 장성은 다리 폭파를 인민군의 짓으로 오해하고


"과연 적이지만 전술을 아는 놈이구만."


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남아 있던 서울 시민들은 생존하기 위해 인공기를 흔들며 '인민 해방군' 만세를 외칩니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후 7월 1일까지 3일간 남진하지 않고 서울에 머무르는데 현재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북한군의 공식적 입장은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반격하다가 얼떨결에 계획 없이 서울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게 뭔 개소리니? 한 번 더 개소리를 지껄여 내 귀를 농락하면 동무의 아가리를 야무지게 꼬매주가서! 


만약 3일을 지체하지 않고 남진했다면 3∼4일 내로 부산까지 북한의 손에 들어가고, 발 디딜 곳을 잃은 미군이 개입을 망설이는 사이에 적어도 7월 중순 이전까지는 한반도 전역이 북한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학자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3. '노병은 죽지 않는다.'던 맥아더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000 대 1의 도박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정도 확률을 감당하는 데 이미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적을 분쇄할 것입니다. 
-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



파이프를 문 모습이 뽀빠이를 연상시킨다.


맥아더는 6.25 전쟁 당시 UN군 총사령관으로 세계 1, 2차 대전에 참전한 전쟁 영웅입니다. 그는 1880년생으로 6.25 전쟁 발발시에 이미 70살의 노병이었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6.25 전쟁에서도 대부분 일본에서 작전 지시를 내렸으며 한국에서 머문 시간은 몇 주일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산 경남 지방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인민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낙동강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을 때 맥아더는 대다수가 반대하던 인천 상륙 작전을 주장하여 그것을 관철시킵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배를 대기가 힘들고 방파제가 있어 인민군의 방어가 용이해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힘들다는 평이 다수였으나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는 결국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 : 1950년 9월 15일 UN군과 한국 해병대가 함께 펼쳤던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다음 가는 인류 역사상 2번째로 큰 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켰습니다. 게다가 때 맞춰서 낙동강에서도 지리하던 일진 일퇴의 공방을 국군이 뚫고 밀고 올라가게 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 대한민국 해군 제독 손원일 -

우리 자랑스러운 해군 제독 손원일은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 장성들이 기겁했다고 합니다. (해병대는 귀신만 잡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도 잡는다.) 심지어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는데...


다만 맥아더는 이후 중국군의 참전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섣불리 북진하다가 패퇴하게 된 점이나 이후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주장했던 것은 실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맥아더 장군의 주장대로 만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면 세계 제 3차 대전으로 가는 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4. 전선의 이동


1950년 6월 말 북한의 남침으로 개전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까지 전선이 밀림. 

1950년 10월 서울을 포함한 기존 영토를 거의 수복

1950년 11월 압록강 근처 중국의 국경선까지 밀고 북진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

1951년 2~3월 1.4후퇴 이후 최남단까지 밀림

1951년 여름~1953년 여름까지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전선 형성


으로 개전 1년 간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고 사망자도 개전 후 1년의 사망자가 이후 2년의 사망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이렇게 징집이 된 (잘생긴...) 형제들이 많았겠죠.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알제? 서울 수복하고 북진을 하다가 인해전술의 중공군에 밀려 다시 전세가 불리해졌다카데. 그래서 다시 후퇴를 하게 되는데 흥남시에서 미군캉 국군캉 피난민들 머빠지게 철수를 하게 됐데이. 


흥남이 어디있냐꼬? 그것도 모리고 모했노? 흥남은 함경'남'도에 있는 항구도시인데~ 한반도 지도를 보믄~ 동해안 쭈욱 올라가다가 가장 움푹 파인 곳 있제? 그기인기라. 움푹 파였다가 러시아 쪽으로 팔을 쭉! 뻗어 올라가는 거 알제? 우리나라 지도 모양이 그려지제? 고 위에 함경북도가 러시아랑 국경을 대고 있꼬, 백두산도 있는 그 곳인기라. 대략 흥남의 크기는 경기도 수원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일끼다. 대강 알겠제? 


우야되었든 왜 하필 흥남으로 피난을 했냐며는~ 북한, 중공군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어 퇴로가 완전 막힌 거 아이가. 우야겠노. 할 수 없이 육로는 못 가고 해로로 부산(거제)까지 그 추운 겨울, 12월에 피난을 하게 된기라. 사실 미군은 우리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카데. 퇴각하는 판에 병력, 장비, 물자 수송에 여유가 있었겠나? 하지만 한국군 지휘관들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미군 장교(누군지는 모르겠다. 나이 들면 이렇게 된데이) 끈질기게 요청을 해가꼬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했다안카나. 


말이 10만명이지 고마 쎄리 윽스로 아수라장이었겠제? 그 와중에 엄마 손 놓쳐 엄마 잃고 우는 가스나, 자기 자식은 배 위로 올려 놓고 자기는 발을 헛디뎌 그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져 동사하는 엄마, 잃어 버린 노모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아들 등 살을 에는 추위에 아비규환이었데이...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아즉도 눈물이 난다. 우야겠노.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 와중에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도 엄청 많았데이. 내 어머니, 사랑하는 마누라 생사도 모르고 그렇게 홀로 피난하는 남은 자의 마음이 어떻겠노. 그래서 50~60년데 부산에는 북한 실향민이 그렇게 많았다 카드라. 


- 위는 가상인물의 증언으로 최종병기가 구성함. 




5. 동족상잔의 비극


3년 동안 최소 200만명이 넘는 사망자 혹은 실종자가 발생(300만 이상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음)하였고 이는 당시 인구의 무려 15%~20%에 해당합니다. 산업 시설물은 남북 공히 1/4가 넘게 파괴되었고 일본이 남기고 간 사회 기반 시설들은 반이 넘게 사라졌습니다. 2차 대전에 일본의 인구대비 사망 비율은 5~6% 정도라고 하니 우리의 피해 규모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 민족의 X맨! 한반도의 대반역자 같으니라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라!) 


하. 

지. 

만. 


사망자와 피해규모로 설명할 수 없는 6.25전쟁의 잔인함이라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휴전까지의 2년은 좁은 지역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었고 좁은 국토에서 3년간이나 전쟁을 치루다보니 한 지역을 하룻밤 사이에 국군과 인민군이 점령하고 점령 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단 한 지역을 점령하고 나면 상대 진영의 뿌리를 자르고 싹을 말리겠다는 생각으로 사상검증을 하고 상대편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옳으냐.' 에 따른 태도가 서 있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점령한 군대에 따라, 혹은 전쟁에 이길 강자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신문은 모두 한자에 TV 보급도 안 된 상태에서 최종병기처럼 한자에 까막눈인 민초들이 사실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구분을 할 수도 없었고...) 


'동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이민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보다 더 잔인했다고 하는데 오랜 역사와 문화를 함께 공유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 동족성을 파괴하는데서 오는 증오와 혐오와 살의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다들 미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측과 북측의 외모가 뒤바뀐 것 아이니?

1950년 7~8월 2달간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 20만명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 2천여만명) 



1950년 8월 하순 경북의 작은 마을에 살던 나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국군 학도병에 지원했다. 당시 불과 15살의 나이였던 나는 우리 부모 가족 친구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빨갱이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증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한 마을로 수색을 나갔다가 민가에 숨어 있는 인민군 두 명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향해 미친듯이 총을 쏘았다.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한 명은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학도병이었다. 이름을 물으니 나와 같은 본의 성씨였고 나고 자란 곳 또한 나와 같은 마을이었다. 그 아이는 우리 마을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북한에 의해 징집된 의용군이었던 것이다. 숨이 붙어 헐떡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잔뜩 겁먹고 눈물을 흘리던 그 아이의 표정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 위는 가상인물의 증언으로 최종병기가 구성함. 


위의 이야기처럼 한 마을의 주민 중 인민군에 끌려간 남한 지역 의용군과 국군 지원병끼리 총구를 겨누고 피를 흘렸으니 이 무슨 비인간적인 비극일까요? 현재를 살고 있는 호피니언과 최종병기는 그 잔혹무도한 화마에서 살아남아 사랑하고 태어난 후손이니 정말 강인한 생존 유전자를 가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한민족이 강해진 힘일지도...) 


그리고 생존한 우리 모두는 강한 자에 눈치 보는 기회주의자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6. 휴전에 이르기까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38선 근방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되던 51년 여름부터 UN군과 북한은 휴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휴전 협상은 진전 없이 지루하게 진행되었으며 53년 들어서는 북한의 김일성이 더욱 더 간절히 휴전에 목을 메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서 북한의 평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희생자도 북한 쪽이 남한에 갑절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2층 이상 건물을 타겟으로 미군 폭격기가 평양 하늘에 떴다가 타겟을 찾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온 예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휴전에 적극적이었고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국방부 장관 신승모는 미군을 등에 업고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을 반대했습니다. (대국민 사기극을 치고 도망간 놈들이...)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25개월 간의 협의 끝에 미군과 북한은 휴전 협정에 사인을 하고 현재까지 휴전 중입니다. 협정 조인 직전인 1953년 7월 한달 간 마지막 땅따먹기 전투를 벌이며 7월 한 달만 10만명이 죽었습니다. 


북한의 한 권력자의 야욕이 불어일으킨 참사는 여러가지 다른 형태로 현재까지 많은 이들을 고통 받게 하는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인민군은 왜 철모를 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보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드라마에서 국군은 쑥색 군복에 철모를, 인민군은 황토색 긴 상의를 입고 상의 중간 허리에 허리띠를 두르고(마치 미니스커트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군모를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민군은 왜 철모가 없을까? 


실제로 개전 초반 인민군의 철모 보급율은 국군의 그것보다 더 높았습니다. 물론 전쟁이 진행되면서 국군의 철모 보급율이 더 높아지기는 하지만 인민군도 철모를 분명히 썼습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드라마에서 인민군이 군모를 쓰고 있는 이유는... 


...시청자들이 피아 구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허탈한가요?) 


아군과 적군을 구분 못하고 아군에 총구를 겨누는 것만큼 바보 같은 군인은 없겠죠. 시청자들도 피아 구분을 못하고 인민군을 응원하는 일이 없도록 친절하게 철모와 군모로 구분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 속에는 국군 = 철모, 인민군 = 군모 로 이미지가 박혀 있습니다. 


인민군과 국군의 스테레오 타입입니다. (아, 외모 말고요...)


7. 6.25전쟁의 영향


6.25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 한홍구, 『 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


잔인성에 있어서는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도 능가하였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다.
- 김동춘, 『 전쟁과 사회 』 -


6.25전쟁 이후 이념 갈등은 남북한 공히 독재 진영에서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국가보안법 등의 이름으로 최근에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은 끝났지만 남아 있는 잔존 세력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끊임 없는 사상 검증을 통한 민간인 학살이 한동안 자행되었습니다. 남한에서 조금이라도 공산당에 협조한 이력이 있다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 행동을 보이면 즉시 사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입은 상처로 인한 증오의 보복이 잔인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심지어 인민군복을 입고 공산당이 좋으냐고 물어서 좋다고 하면 사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싫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야.) 

그녀도 결국 남측의 손에 죽고 맙니다. 그나저나 배우 이은주의 미소가 어쩐지 짠하네요.

죽 쒀서 개 줬다고 일본에게 6.25 전쟁은 크나 큰 축복이었는데 군수 물자를 모두 일본으로부터 조달했고 미국의 달러가 일본에 엄청나게 흘러들어가 전쟁 특수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으로 벌어들인 달러는 일본은 2차대전 패전 국가로서 국가 재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전단지 인쇄까지 일본에서 해서 들여왔다고 하니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습니다. 6.25 전쟁은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일본을 배불리고 부활시킨 친일 전쟁이었습니다. 



무려 67개국이 참여한 국제전이었던 6.25 전쟁으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희생 당했습니다. 이 좁은 국토에는 우리 선배들의 상흔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선배의 피를 딛고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여 세계 군사력 7위(물론 주변에 중국, 소련, 일본이 있어 다소 약해보이지만) 국가로 발돋음하였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 주변 국가는 없고 심지어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도 다를 수 있겠지만 다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이 무엇일지는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전쟁 영화라면 당연히 팔, 다리 쯤은 몸통과 생이별을 하고 선혈이 낭자하며 충돌과 갈등 그리고 증오가 극단으로 치닫는 영화를 기대하게 됩니다. 인간 역사에서 서로 죽이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전쟁만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은 없으니까요. 아마도 설경구와 여진구, 구구 형제의 <서부전선>은 6.25 전쟁의 전장을 배경으로 한 콘텐트 중 가장 잔인함은 덜었고 유머는 더한 영화일 것입니다. 


위정자들의 이념 갈등과 권력 다툼 속 내가 살아 돌아가기 위해 서로의 목을 조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사랑하는 이의 손 대신 총을 들고 살기(殺氣)로 무장해야만 했던 민초들의 가여운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그 악다구니 속에서 귀여운 아가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는 남편과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사랑을 꿈꾸는 피어나는 청춘의 흐뭇한 우정을 <서부전선>,<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전쟁영화 다운 자극적인 영상과 적을 섬멸하는 통쾌함은 없지만 한 언어를 쓰며 소통하고 서로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 민족으로서 함께 행복하고 번영하기 위해 비록 멀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잔잔히 보여줍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앞둔 두 병사의 이야기,

여진구,설경구 구구형제가 열연한 남북한 병사의 코믹/액션/블럭버스터(?) 드라마 <서부전선>,


그저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동생 공부 시키고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

동족상잔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데올로기의 허무함을 강조한 전쟁 드라마 <태극기 휘날리며> 입니다.


<끝>


<서부전선>,<태극기 휘날리며> -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written by 최종병기, ⓒ 최종병기

병맛나는 삼류 쌈마이 글, 자유롭게 퍼가셔도 좋지만 출처는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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