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되지 말자>

육아휴직 315일차

by 허공

욱, 아이의 감정 발달을 방해한다


사람에게는 감정의 그릇이 있다. 그 그릇에 부정적인 감정이 점점 차오르다가 별안간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 ‘욱’이다. 욱은 마치 상대를 공격하듯이 충동적으로 나온다. 부모들이 욱하는 모습을 보면 두 부류다. 하나는 감정을 담는 그릇 자체가 너무 작아서, 조금만 불편한 감정이 유발되어도 바로 분출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항상 짜증과 신경질을 달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감정의 그릇은 그렇게 작지 않아 평상시에는 제법 잘 참고, 온순한 성격으로까지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감정의 그릇에서 한 방울이 넘치면 ‘하이드 씨’가 되어 버린다. 문제는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한 방울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항상 불안하다.

감정 그릇이 차서 넘치기 전에 조금씩 버리거나 덜 담으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감정 조절이다. 정서가 잘 발달한 사람은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그에 맞게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다. 감정을 담고 버리는 것이 자유자재로 된다.


감정 발달은 후천적이다. 보통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학습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직접 감정 조절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가족 간에 감정 조절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감정 발달이 잘 되지 못해 감정 조절이 미숙하다면, 아이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욱은 딱딱하게 뭉친 감정의 덩얼다. 이것이 마치 폭탄처럼 튀어 나가 상대방을 공격한다. 사실 이 감정의 덩어리는 한 가지 감정이 아니다. 그 정체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세밀하고 다양하다. 화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걱정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당황스러움도 있고, 고통도 있고, 불쾌함도 있고, 배고픔도 있고, 불편함도 있을 수 있다. 욱 안에는 너무나 다양한 감정과 원인들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이 많은 감정을 그 감정 상태 그대로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고, 한데 똘똘 뭉쳐서 큰 덩어리로 만들어 상대방에게 쏟아 버리는 것이다.

욱하는 부모가 가진 감정 표현은 단순하고, 종류도 몇 가지 안 되고, 강도는 항상 세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학습한 아이는 감정 발달을 그르치게 된다.


우리 뇌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다양한 감정을 조율하는 부위가 변연계다. 부모가 욱하는 모습만 보고 자란 아이는 이 변연계가 무뎌진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무딘 아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기분이 좀 나쁘고 불편해지면 욱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줄 알게 된다.


아이 앞에서는 절대 욱해서는 안 된다. 욱하는 감정은 쉽게 배워지고, 욱으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고치기가 정말 어렵다. 내 아이가 욱하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원치 않는다면, 어릴 때부터 부모가 철저히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온통 ‘자기 입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 감정만 중요하다. 마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듣는 것에는 미숙한 것과 같다. 늘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만 우선시하기 때문에, 내가 이 표현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정서가 잘 발달된 사람은 내 감정도 잘 포착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도 고려한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만 꼽으라면, 기다리는 것과 아이를 나와는 다른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발달을 지켜볼 때도 기다려야 하고, 아이를 가르칠 때도 기다려야 한다. 아이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 주는 훈육 또한 기다림이 가장 중요하다. 중간에 간섭하지 않고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만 잘해도 아이는 잘 자란다.


잘 기다려 주려면 아이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를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거나, 아이를 나의 소유로 생각하면 기다리지 못한다. 아이가 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고나, 내가 계획한 것도 다른 방향으로 가면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주 천천히 배운다. 여러 번 가르쳐 주고 그것을 뇌에서 처리하기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자꾸 ‘빨리’를 부르짖으면 그렇게 못한다.

욱하는 부모가 요구하는 ‘빨리빨리’는 민첩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채근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의 마음이 불편해진다. 긴장감이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진다.


아이에게 욱하고 나서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이가 말을 잘 안들어요”다. 부부 간에 욱하고 나서 많이 하는 말은 “말이 안 통해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계속 하잖아요”다. 공통점은 결국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욱은 상대에 대한 제압의 의미가 있다. 상대를 감정적으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상대를 장악하고 굴복시키려고 했는데, 안 되었을 때 욱한다.


가정교육을 시킨답시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그 밑바닥에는 성급함이 있다. 육아에서 뭔가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면, 마음이 급해지면서 소리를 지르게 된다. 엄마는 급해 죽겠는데, 아이는 늦장을 피우며 옷을 입고 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야’가 나온다. 외국 부모들은 이럴 때 “네가 이 시간까지 준비를 안 하면, 엄마 아빠는 그냥 가야 해, 그러면 너를 따로 돌봐줄 유모를 부를 수밖에 없어”라고 이야기 한다.

부모들은 참다 참다 자기도 모르게 욱했다고 말한다.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우다가 그랬다고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아이를 키울 때도 상위 레벨이 있다. ‘아이에게 절대 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육아의 가장 상위 레벨의 가치다. 아무리 시간과 돈, 체력을 들여서 최선을 다해도, 부모가 자주 욱하면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좋은 것을 먹여 주고 보여 주는 것보다, 욱하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는 백배 더 유익하다.


만약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아이를 키운다면, 그 아이는 어떨까? 최악이다. 아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혼란스러워지면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 아이는 내재화되는 자기 기준을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존감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출처> 오은영 박사님의 못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28~41쪽


오늘도 오은영 박사님의 책을 읽어 보았다. 어떤 구절을 읽어도 구구절절 내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나의 감정 그릇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은영 박사님이 말한 평소에는 온순하다가 갑자기 하이드 씨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도 짜증을 낼 때도 있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다리는 것과 아이를 나와 다른 인격체로 생각하라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결국 기다리는 것은 나의 몫이다. 기다리지 못해 아침마다, 그리고 때때로 채근하는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긴장감이나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니.


육아의 가장 상위 레벨인 절대 욱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 쉽지만 결코 지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화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아이를 잘 교육시키고 열정적인 엄마, 아빠라고 욱하는 모습 한 번이면 무너진다니 맞는 말이다.

그래도 사람은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상위 레벨을 달성해보자. 누군가는 달성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오늘 아이들을 등원시킬 때 또 욱할 수도 있다. 그래도 노력해보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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