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에잇>을 배경음악으로 스르지산 석양을 바라보다
원래 계획대로 잘 흘러갔다면 선셋 크루즈를 타러 갔을 시간. 강풍으로 취소된 바람에 차선으로 스르지산 정상을 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원래는 다음날 저녁 일정 후보 중 하나였지만 숙소에서 여기를 다시 오려면 대중교통을 타야 했고, 두 사람은 두브로브니크 1일 패스를 구매했기 때문에 다음날 대중교통을 가급적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 올드타운 주변 일정은 다 끝내버리자고~"
올드타운 북쪽 부자 게이트를 통해 나오니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티켓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광고하는 가게가 여럿 보였지만 둘은 공식적인 방법으로 티켓을 구매하기로 했다.
석양으로 유명해서 그런지 아니면 올드타운 지붕 색깔 탓인지 혹은 두 가지 모두의 영향인지. 두브로브니크 케이블카는 매우 주황주황했고 키오스크도 주황주황했다. 이쯤 되면 그냥 이 케이블카는 일몰 보러 오라는 케이블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직 일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탑승하는 줄은 그리 길지 않아 금방 올라갈 수 있었다. 다만 케이블카에 수용 인원을 꽉 채워 올려 보내기에 원하는 뷰를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
케이블카는 꽤 빠르게 올라간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올드타운 및 성벽이 한눈에 보이고 올라가는 방향 기준으로 왼편을 보면 해가 지는 모습도 보였다. 케이블카를 탈 때 저런 뷰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했다 해도 사람들이 다 내릴 때를 틈타 구경하는 방법도 있다.
내려서 돌아보니 전망대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내리자마자 올드타운을 내려다보고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이런저런 전망을 볼 수 있는데 실내는 기념품샵 정도가 있고 밖으로 나가면 공연장, 어트랙션을 탈 수 있는 곳, 레스토랑 정도가 눈에 띈다.
처음에는 올드타운 쪽을 보느라 정신없었는데, 실컷 보다가 뒤돌아보니 그 긴 디나르 알프스가 더 멀리까지 잘 보였다.
잠시 디나르 알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디나르 알프스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산맥으로, 크로아티아 자연환경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다.
J와 P 둘에게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를 접한 나라-즉, 바닷가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스플리트에 도착할 때부터 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길게 뻗은 산맥이었다. 이 산맥은 어찌나 긴지 플리트비체에서 두브로브니크를 가는 동안에도 계속 볼 수 있었다.
이 산맥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던 P는 Gemini에게 산맥의 정보를 물었다. 시작은 단순하게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북쪽에 동서로 긴 산맥이 보이던데 이 산맥 이름과 지리적 특성에 대해 알려줘"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산맥은 디나르 알프스(Dinaric Alps) 산맥이며,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있고, 자연경관과 지리, 기후에 큰 영향을 주는 산맥이라는 놀라운 답변을 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긴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 사이에 접한다고 다른 웹사이트에도 적혀있었다.
이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디나르 알프스를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초록색이다가 일정 높이를 넘어가면 더 이상 나무 등이 자라지 않고 암석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기준 고도가 어느 정도야? 그리고 높은 곳에서 주로 서식하는 식물 종류가 궁금해."
이 내용을 질문한 이유는 디나르 알프스를 보면 공통적으로 어느 고도 이상이 되면 설백색의 암석들이 드러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아티아 디나르 알프스 산맥에서 관찰하신 현상은 수목 한계선(treeline)과 관련된 것입니다. 수목 한계선은 기온, 강수량, 토양, 바람 등 여러 환경 요인에 의해 나무가 더 이상 자라기 어려운 고도를 의미합니다. 이 고도를 넘어서면 키 큰 나무 대신 관목, 초본 식물, 이끼, 지의류 등 낮은 식물들이 주를 이루거나 아예 암석만 드러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럽 알프스 산맥의 경우 약 1,800m에서 2,200m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디나르 알프스도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므로, 이 범위 내에서 수목 한계선이 형성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디나르 알프스는 체코의 블타바 강에 이은 또 다른 발견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긴 산맥이 있다니. 게다가 그 윗부분은 그 어떤 나무도 뿌리내릴 수 없는 암석뿐이라니.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알프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전망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여기서 석양 뷰를 보는 게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석양 뷰를 보기에 생각보다 시원찮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전망대 아래쪽에 레스토랑이 있고 거기서 석양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저녁을 먹었고 굳이 별도의 돈을 내면서 볼 생각은 없었다. 둘에게 석양을 보려고 지불할 돈의 한계는 케이블카 왕복 비용뿐이었다.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있어 가보니 그 끝자락에 매달려야 겨우 석양이 보였다. 게다가 건물 하나가 가려서 해가 질수록 그 건물이 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면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다 했는데 이렇게 보는 게 정말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건물 정체부터 좀 알아보자."
구글 지도에서 현 위치를 중심으로 찾아보니 저 건물은 국토 전쟁 박물관이란다.
"저길 가면 혹시 더 잘 보이려나?"
"여기보다 상대적으로 서쪽이니 더 잘 보이긴 하겠지? 근데 박물관 들어가려면 입장료 내야 하는 거 아닐까?"
구글 지도를 좀 더 서쪽으로 확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다 국토 전쟁 박물관 서쪽에 Ausblick Dubrovnik라는 포인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리뷰를 읽어보니 석양을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도보로 갈 수 있는지 경로를 검색해 보니 도보 5분이라며 길 안내가 나오길래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유 있게 올라온 덕에 일몰까지 시간도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스르지산은 디나르 알프스의 일부인지라 암석이 많았다. 즉 돌길을 지나야 해서 잘못하면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었다. 여기저기 무성한 수풀도 헤치며 드디어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온 길과 다르게 탁 트인 전경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으로 지고 있는 태양. 그리고 바다에 비친 금빛과 주황빛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석양. 너무도 완벽한 풍경이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캔맥주를 마시며 기다리는 일행들도 있었고, 커플끼리 오붓하게 앉은 경우도 있었다.
두 사람도 석양이 잘 보이면서 적당히 앉기 좋은 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기까지의 길이 그랬듯이 바위가 많고 평지가 거의 없어 앉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좀 평평한가 싶어서 앉아보면 겉으로 볼 때 몰랐던 뾰족한 바위가 엉덩이를 찌른다던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침 어떤 커플이 자리를 옮기기에 그쪽으로 가보니 처음 자리 잡은 곳보다는 한결 나았다.
아직 일몰까지는 삼십여분 남은 시간. 여태까지는 계속 움직여서 몰랐는데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바람이 강하고 꽤 서늘하다. 올드타운의 기온은 25도 정도였지만 여기는 고도가 높아 16~18도 정도 되었다. 반소매 옷만 입고 있던 J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P는 그나마 일교차를 대비하여 가디건을 챙겼었기에 좀 나았는데 J가 떠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됐다.
"추우면 내려갈까?"
"아냐, 이 좋은 곳을 포기할 순 없어. 게다가 저기 민소매 원피스 입은 분도 꿋꿋이 계시잖아."
아마 대부분의 여행객은 여기 올라왔을 때 추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J의 말대로 민소매 옷을 입거나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꽤 많았다. 하지만 석양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들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물론 준비성 좋은 사람들은 여분의 담요를 갖고 오기도 했다.
좀 덜 추우면서 시간을 보낼 방법이 뭘까 고민하던 P는 갑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J에게는 익숙한 전주였다.
So are you happy now?
Finally happy now, yeah
뭐 그대로야, 난
다 잃어버린 것 같아
노래의 정체는 아이유의 <에잇>이었다. J는 갑자기 P가 왜 이 노래를 재생했는지 궁금했다. 볼륨을 크게 설정하진 않았지만 주변에 한국인 관광객들도 있으니 이 노래를 인지할 수도 있는데 난데없이 이 노래를 재생한다고?
그러다 갑자기 P가 태양을 가리키며 립싱크를 시작했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춰
정해진 이별 따위는 없어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드디어 J는 깨달았다. P가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를.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 아이유의 팬이라는 것도 있었다.
2022년 9월, 둘은 아이유 콘서트를 갔었다. 9월답지 않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공연에 두 사람은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유의 티켓 파워가 워낙 강해서 비록 연석을 앉지는 못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오랜만에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본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공연장은 하늘이 훤히 보이는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이었다. 해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구름이 있었다. 두껍지 않아 하얀 구름. 이윽고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구름에 노을이 반사되어 점차 주황빛을 띠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기는 더 강해졌다.
그 붉게 물든 하늘이 점차 어스름으로 변해가려 할 때 전광판 조명이 꺼졌고 관객들이 들고 있는 응원봉에만 쨍하게 하얀 불빛이 들어왔다. 이는 곧 공연이 시작된다는 뜻임을 아는 관객들은 기대감에 목청을 한껏 돋우었다. 그러다 잠시 그 소리가 잦아든 그때-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전주도 반주도 없이 바로 시작된 노래. 그 노래 제목이 <에잇>이었다. 숨을 고르는 듯한 짧은 일시정지가 지난 후 그녀는 노래를 이어갔다.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춰
아직 오렌지빛 노을이 살짝 남아있는 시간에 이렇게 공연이 시작되다니, 우리는 감격하고 말았다. 짧은 순간만 볼 수 있는 노을 시간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정해진 이별 따위는 없어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그 공연에서 멋진 순간은 숱하게 많았지만 이 오프닝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가사 그대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기억 속에서 지속적으로 만남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https://youtu.be/Cxzzg7L3Xgc?si=N8o84MRu_76LO0ta&t=21
세상이 점차 적황색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 P는 3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고자 했고 J는 그 분위기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반복적으로 그 노래를 들었다.
이윽고 해가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시작하여 주홍빛으로 끝나는 시간. 너무도 아름다운 일몰이었다. 이 시간 동안은 추위도 잊었다.
인생사 정말이지 새옹지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셋 크루즈를 못 탄다고 낙심했던 게 몇 시간 전이고, 케이블카로 올라와서라도 보겠다고 왔다가 생각보다 일몰이 안 보인다는 것에 또다시 좌절했다가, 이거라도 시도해 보자는 마음으로 구글 지도에 표기된 곳까지 와서 이렇게 엄청난 일몰을 보다니.
해가 졌으니 돌아가자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달이 고개를 들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가 지니 바로 나타나는 달이라니,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이 좋을 수가 있는가?
두 사람은 빨리 내려가서 좀 더 가까이에서 달을 보기로 했다.
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까? 일몰 보고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올라올 때보다 훨씬 줄이 길었다. 꽤 오래 기다린 후에야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서 동편을 보니 어둑해진 바다에 비친 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머리로는 어차피 달은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올드시티 보트 선착장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자 게이트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가 왼편이라는 건 알았지만 일부 길을 통제하는 곳이 있어 길이 헷갈렸다.
방향을 더 빨리 알아챈 쪽은 J였다. "이쪽으로 와!"라는 외침에 P가 뒤늦게 쫓아갔고,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달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P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고 끊임없이 감탄했다. 마치 드뷔시의 <달빛>이 연상되는 아름다움이라 느꼈다. 조금 전까지는 산 위에서 오렌지 빛 석양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바다에 비친 금파를 보다니! 흔히 바다에 비친 달빛은 은파라고 하지만 이 빛은 금물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색이었다.
반면 J는 바다에 인접한 곳에서 자라서 이런 풍경이 익숙했고 P가 이렇게까지 감탄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석양을 보며 아이유의 <에잇>을 배경 음악으로 깔아준 P의 센스에 이렇게나마 보답할 수 있는 점이 기뻤다.
둘은 달구경까지 마치고 천천히 입구를 향해 갔다. 어쩌다 보니 올드타운 야경도 구경하게 된 셈이라 굳이 서두르지 않고 즐기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J가 사람들이 몰린 곳이 있다며 가보자고 제안했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고양이들이 있었다!
당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는데 그래서 고양이들이 저렇게 편히 있는 듯했다. 나중에 구글 지도 리뷰에서도 찾아보니 고양이 목격담이 제법 있었다. 낮에는 늘어져있는 모양이다.
https://maps.app.goo.gl/KqrLRFBLQRFrkvg88
아름다운 바다, 일몰 그리고 월출, 게다가 고양이까지. 두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준 두브로브니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에잇> 노래의 가사처럼 두브로브니크가 두 사람의 기억에 아름답게 남을 거라는 그리고 그 기억과 자주 만나리라는 예감-아니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여행의 마지막 장소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떠날 날이 다가옴에 슬픈 마음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