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넷 수집, 맨홀 뚜껑 사진, 그리고 하나 더
독자님들은 그 여행지를 기억하는 자신만의 루틴이 있는지 궁금하다. 지인들의 예를 들자면 혹자는 그 나라의 지폐를 종류별로 모으기도 하고, 혹자는 그 나라의 여행지가 담긴 엽서를 사기도 하고, 혹자는 여행지의 랜드마크에서 항상 동일한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아, 모자를 수집하는 경우도 봤다. 여행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흔한 상징 중 하나가 "I ❤️ SEOUL" 같은 식의 문구 아니던가. 이런 게 적힌 모자나 티셔츠를 수집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꽤 흔하게 볼 수 있었다.
J와 P의 경우 마그넷을 사는 루틴이 있다. 그렇게 하나씩 모으다 보니 내가 어느 나라의 어느 여행지를 갔었다는 기록이 저절로 되더란다. 예전에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구매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마그넷이 너무 많아졌고, 이제는 정말 인상적인 곳 혹은 정말 마음에 드는 마그넷을 발견할 때만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맘에 드는 곳이어도 둘의 성에 차지 않는 마그넷만 있을 땐 과감히 포기했다.
J의 경우는 동생이 프랑스 여행을 다녀오며 에펠탑이 새겨진 마그넷을 선물로 사준 적 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그넷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여행지를 갈 때 마그넷이 자꾸 눈에 띄었다.
P는 예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다 카지노에서 흔히 보이는 칩 모양의 마그넷을 발견했다. 그걸 사서 나눠줬더니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더란다. 뭔가 잭팟을 터뜨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나? 그런 반응을 접한 와중에 J의 마그넷 수집 루틴을 알게 됐고 P도 괜찮아 보여 따라 하게 됐다.
P에게는 여행 루틴이 하나 더 있다. 맨홀 뚜껑을 찍는 것인데, 이걸 찍게 된 계기가 독특하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여행하던 시절의 일이다.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광장 푸에르타 델 솔에는 0km 지점(Kilómetro 0 de las carreteras radiales de España)이라는 곳이 있다. 이것을 밟으면 스페인에 다시 온다는 속설이 있다.
당시 P는 마드리드에 3박 4일을 있었는데 처음에는 마드리드의 인상이 썩 좋지 않아 이걸 굳이 밟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고 마드리드를 떠나기 직전 위 사진을 찍었다. 아직 스페인을 다시 가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언젠가 가야지'라는 소망을 품고 있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꽤 맘에 들었던 P는 다른 여행지에서도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찍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마드리드처럼 '이거 밟으면 다시 옴' 이런 상징물이 있는 여행지도 있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맨홀 뚜껑이었다.
그 루틴은 이번 여행에서도 이어졌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다음날, 세체니 온천을 가던 도중 갑자기 P가 멈춰 섰다.
"맨홀 뚜껑이다."
갑자기 맨홀 뚜껑 얘기를 왜 하나 싶었던 J는 P가 대체 뭐 하려고 저러나 싶어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랬더니 P는 맨홀 뚜껑 위에 본인의 발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J 입장에서는 뜻밖의 돌출 행동이었다.
"그거 왜 하는 거야?"
"그냥 내 여행 루틴이야. 스페인에서부터 시작된."
J는 P와 여행을 꽤 여러 번 다녔는데도 이 루틴을 처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같이 다닌 여행 중 이런 걸 찍을만한 곳이 별로 없긴 했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희한하다. 이거 꽤 색다르고 재밌어 보였다. 도시명도 남고 꽤 괜찮아 보였다.
"나도 할래!"
그렇게 J도 P의 여행 루틴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P가 땅바닥만 보고 다니는 건 아닌 게 확실한데 어떻게 이걸 찾고 찍는 거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J가 물었다.
J가 마그넷을 살 때 나름의 원칙이 있는 것처럼 P도 맨홀 뚜껑을 찍을 때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당연히 땅만 보고 다니진 않지. 근데 맨홀 뚜껑은 크잖아. 지나가다 바닥에 뭔가 둥글고 큰 게 보이면 그때 잠시 유심히 보는 거지. 그리고 너무 오염이 심한 경우는 찍지 않고 도시 이름이 없어도 안 찍어."
오스트리아 빈은 위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고 그래서 맨홀 뚜껑 사진을 찍지 않았다.
맨홀 뚜껑을 찍게 된 계기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바닥 장식물이어서인지, 찍는 대상을 반드시 맨홀 뚜껑에 한정 짓지도 않았다. 특히 프라하에서는 세 가지를 찍었는데, 맨홀 뚜껑 주변의 길바닥-그러니까 돌 장식이 각자 달라서 찍은 것도 있었다. 평범한 아스팔트 바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는 J가 P를 도와주기도 했다. 크로아티아는 도시 이름이 적힌 맨홀 뚜껑 찾기가 어려웠다. 번역기를 돌려보면 '하수도'라는 단어가 적혀있을 뿐.
그런데 스플리트에서 신호 대기하던 중 J가 말했다.
"어, 이거, 기둥 위에 이거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거 같은데."
건널목에 쇠기둥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꼭지에 성과 크로아티아 문장 같은 것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마 스플리트 지역 특성을 고려할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새긴 것 같았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에서 드디어 DUBROVNIK가 또렷이 새겨진 철판 바닥을 보았다. 맨홀 뚜껑은 아닌 거 같았지만, 그래도 도시 이름이 있으니 찍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찍은 바닥이다.
J가 고안해 낸 루틴이 하나 더 있다. 둘이 같이 여행을 갈 때 하는 것인데, J가 갖고 다니는 캠을 이용해서 셀카 모드로 영상을 찍으면서 "우리는 OOO에 왔다~"고 외치면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이었다. 그러면 둘의 모습과 여행지 지명과 그리고 배경으로 그 여행지가 같이 찍혔다. 영상은 J가 소장했다. J의 아이디어이기도 하거니와 P는 굳이 그 영상을 본인이 소장할 필요는 없으며 그냥 같이 여행한 걸 J가 갖고 있으면 그만이다 생각했다. 그도 다 추억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에서 구입한 마그넷을 공개한다.
중간에 있는 오스트리아(인스브루크, 잘츠부르크, 빈 슈테판대성당) 마그넷 세 개는 예전에 P가 구입한 것으로, 이번 여행에서는 오스트리아 마그넷은 별도로 구입하지 않았다. 할슈타트에서 마그넷을 구경하기는 했으나 퀄리티가 두 사람 성에 차지 않아서다.
두 사람의 루틴에 대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선택 조건이지 필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건이 되지 않으면 그것만을 위해 고집하지 않는다. 루틴은 여행지를 더 잘 기억하려는 방법이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의 일부이지,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것이 J와 P의 여행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