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다시 만난 세계

여행을 해본 이가 누릴 수 있는 특혜

by 김연큰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다음에는 안 가본 곳 중 어딜 가보고 싶어요?"


그때마다 '사실 이제는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다'라고 답변한다. 정말이다.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은 거의 다 가봤다. 굳이 하나라도 억지로 끄집어내자면 빅토리아 폭포 정도? 세계 3대 폭포 중 나이아가라와 이과수를 이미 가봤으니 기왕이면 남은 하나도 가보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은 있지만 돈이나 시간이나 체력 등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좀 어려울 거 같다.


요즘은 오히려 이미 가본 곳이 생각나고 그리울 때가 있다. 이미 좋은 추억이 된 곳이 생각나는 건 당연한 것이긴 한데 '아, 이제는 이미 가본 곳에 더 관심이 있구나'라고 결정적으로 느낀 계기가 있다.


얼마 전 EBS <세계테마기행>을 볼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돌로미티일 게다. '오~ 멋있군'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출연자분께서 느닷없이 케이블카를 타고 스위스 체르마트로 가는 것 아닌가?


체르마트는 나에게 있어 스위스 여행 중 가장 좋은 기억을 안긴 곳이다. 대부분의 여행자에게는 마터호른을 보려고 가는 작은 마을이지만 나는 그 마을 자체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마치 선베드처럼 거의 누울 수 있던 나무 의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와중 방송에서 내 기억 속 그 의자도 나오고 마을 곳곳의 골목도 나왔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다 내가 다녀본 곳이었다. 추억에 젖어 아른아른하게 보고 있었다. 다시 가고 싶지만 그러기에 스위스는 너무 비싼 곳이다.


또 최근에는 홈쇼핑에서 남미 여행 상품을 파는 것을 보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우유니 사막이나 마추픽추를 볼 땐 '언제 가볼 일이 있으려나~' 식으로 멍하게 보고 있었는데, 이과수 폭포와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정좌를 했다. 이과수 폭포에서 신나게 보트를 탔던 일, 마치 나를 삼켜버릴 듯하던 악마의 목구멍, 부서지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며 기후 변화를 걱정하던 기억이 물밀듯이 다가온 탓이었다.


이처럼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나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여행 상품을 볼 때 이미 가본 나라를 더 집중해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가본 나라라고 해서 모두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건 아니고 '특히 여기는 좋았다'라고 각인된 곳들이 그러하다. 캐나다 밴쿠버, 남미 파타고니아, 발칸 반도가 대표적 사례다. 아, 국내 중엔 울릉도와 독도도 그렇다.


어쩌면 여행을 다녀온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지가 좋았다면 훗날 '이런 추억이 있었지'하며 되새기라고.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느끼지도 못할 감정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어딘가 새로운 곳을 가보기는 해야 할 거 같다. 그렇다면 어딜 가면 좋지? 훗날 회상할 수 있을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여행지를 찾아봐야겠다. 물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나쁜 기억을 안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일단 떠나서 겪어야 알 수 있으니 미리 겁먹지는 않을 테다.


이 글은 <잔기술>이라는 에세이 쓰기 소모임에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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