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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이너 May 27. 2020

개량한복 입고 등산하는 변호사, 아니 백수...

취향과 취미에 관하여

<내 법대로 산다 - 봄 편> - 본문






양복 대신 개량한복


지금의 내 생활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의식주 중에서도 '의'가 제일 앞에 나오듯이, 아무래도 '입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로펌에 다닐 적에는 매일 양복을 입었다. 원래도 포멀한 옷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양복은 더 갑갑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도 셔츠 위에 자켓까지 다 입어야 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셔츠가 다 젖은 채로 사무실에서 아침을 시작해야했다. 고객회의와 재판 등 외부 일정만 아니면 굳이 양복을 왜 입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양복을 입지 않고 일을 하면 업무 효율성이 20%는 더 오를 것 같은데... 그래서 저녁에는 회사와 10분 거리인 집에 들러 편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회사에 와서 야근을 하곤 했다. 내가 얼마나 양복과 넥타이를 싫어하는지는 예전에 쓴 아래 글에서 이미 많이 떠들어 댄 바 있다. 로펌에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는 표현은 비유를 넘어 실제였던 것 같다.



이제 백수가 된 마당에 뭐 별다른 일정도 없고 일정이라곤 도서관에 가서 매일 똥글(?)을 쓰는 것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 매일 아침 '오늘은 뭐 입지?'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뭐 그렇게 고민한다고 옷을 잘 입지도, 누가 옷을 잘 입는다고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괜히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비록 그 이유는 다른 것 같지만...).


그래서 인터넷에서 편하게 매일 같이 입을 옷 없나 하고 찾다가 우연히 개량한복을 알게 되었다. 개량한복이라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니고. 사기 전에는 이걸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진 않을까 고민이 됐었다. 그러나 일단 사서 입고 난 후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몸을 여유롭게 감싸는 핏과 통풍이 잘 되는 면은 내 몸과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었다. 핏한 셔츠와 목을 죄는 넥타이가 나를 구속했던 것과는 반대로. 한번 개량한복을 입고나자 예전에는 몸에 착 달라붙은 다른 옷들을 어떻게 입었는지, 이제는 그런 옷들을 입을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혹시 개량한복에 혹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하자면, 개량한복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무지 튄다는 점을 각오해야 한다. 개량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 힐끗힐끗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고 (나에게 들릴 줄은 차마 몰랐겠지만) "저사람 저거 개량한복 아니야?ㅋㅋ" 이런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또 아침마다 서촌에서 경복궁 뒤 청와대를 지나 삼청동에 있는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길에 경비대원들이 많이 서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 가십니까?", "혹시 1인 시위 하십니까?"라는 검문을 자주 당하게 되고, 이번 총선 기간에는 황교안 후보 선거 유세차량을 길에서 만나 개량한복을 소재로 대화도 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나 같은 아싸도 주위의 관심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가장 웃겼던 반응은 독서모임에 처음 개량한복을 입고 나갔었는데 한 친구가 대뜸 "요즘 택견하세요..?"라고 한 것이다. 집근처 인왕산에 오래된 택견수련터가 있다는데 이참에 택견이라도 배워야 하나.


개량한복 입고 출근길에 셀카




골프 대신 등산


로펌에서는 대부분 취미로 골프를 친다, 아니 취미가 아니라 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내 골프 대회도 종종 열리고 연차가 올라갈수록 고객과 같이 골프를 치게 되는 자리도 많아진다. 그래서 선배들은 웬만하면 신입 때부터 골프를 미리 배워두라고 조언해준다. 또 골프는 식사자리에서도 단골 대화주제로 어느 프로골퍼가 무슨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얘기, 사내에서 누가누가 골프를 잘 친다는 얘기, 좋다는 골프 장비, 골프 강습 등에 대해서 얘기하곤 한다. 골프에 대해 1도 모르는 나는 적당히 듣는 척 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맛있는 걸 독차지 하는 시간이 되겠다. 처음에는 나 같이 골프를 배우지 않는 동료들이 몇몇 었지만 하나둘씩 골프를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골프를 치지 않는 어쏘가 거의 나밖에 남지 않았었다.  


내가 골프는 배우지 않았던 이유는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였다. 퇴근한 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다지 끌리지도 않는 골프를 배우려면 또 내 시간을 골프 강습에 할애해야 하고, 장비도 사고 강습도 듣고 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자연을 좋아하긴 하지만 골프장처럼 인위적으로 꾸며진 자연보다는 좀더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을 걷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골프 대신 등산을 즐겨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등산을 다닌다고 하면 아재 소리를 들었었는데, 요즘은 인스타를 중심으로 인싸들도 등산을 많이 한다고 하니 등산이 다시 핫한 취미가 된 것 같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등산장비를 다 갖추고 지리산 원정 산행 같은 것을 가는 그런 프로등산러는 아니다. 사실은 등산모임에 나가도 항상 뒤쳐져서 꽁무니에 겨우 따라가는 저질체력에 가깝다. 그냥 적당히 편안한 옷차림으로 물한병 들고 숲 둘레길 정도 여유롭게 걷는 게 좋다. 서촌에는 근처 둘레길이 많아서 참 좋다. 그래서 그런지 등산을 가도 꼭 정상에 가서 뷰를 봐야 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다. 오히려 여유롭게 능선을 걷다가 가슴에 담아두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등산보다는 좀 지루하겠지만 여유롭게 능선을 타는 등산이 우리네 인생과 더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직동 둘레길을 걷다가




취향, 취미에 관하여


몇년 전 인터넷에서 재밌는 도표를 본 적이 있다. '품위'와 '간지'라는 두 축으로 세상에 있는 여러 취미들을 배치해 놓은 표다. 내가 하는 등산은 골프보다 품위, 간지 면에서 모두 한참 낮은 위치에 있다... 이런 표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를 결정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내 취미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왜 내가 하는 것들은 다 아래에 있지ㅋㅋ


그러나 취향은 각자 생겨먹은대로 다 다르다. 그래서 취미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자기가 맘에 드는 것을 맘에 드는 대로 하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 <족구왕>의 주인공 홍만섭이 좋은 참고가 된다. 홍만섭은 군대를 다녀온 대부분의 성인 남자가 그러하듯 군대에서 주구장창 족구를 했는데, 전역 후 복학을 한 다음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족구에 미쳐있다. 심지어 총장에게 캠퍼스에 족구장을 만들어 달라며 '족구 하는 소리'만 하고 있다. 족구라 하면 자동으로 아저씨들의 땀냄새가 연상될 정도로 비인기 취미가 아닌가. 위 취미 도표에 족구는 아예 있지도 않다.


홍만섭이 좋아하는 서안나도 이런 세상의 인식을 대변하듯 홍만섭에게 "족구가 재밌건 말건 여자들은 싫어해요."라고 말한다. 이에 홍만섭은 이렇게 대답한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공무원시험 장시생인 선배 형국도 진로에 대한 고민 없이 족구에만 미쳐있는 홍만섭에게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어본다. "홍만섭, 너한텐 족구가 뭐냐?". 이에 홍만섭은 또 이렇게 대답한다.


...재밌잖아요.


대사는 1분 25초부터. 이 장면은 영화를 돌려볼 때마다 이유없이 눈물이 맺히는 장면이다.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페퍼펀스의 노래도 압권.


백수가 된 나는 요즘 양복 대신 개량한복을 입고, 골프 대신 산에 오른다. 사회에 억지로 내 자신을 맞추지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지도 않고, 그냥 나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족구왕의 홍만섭이 족구에 관해 그러했듯, 뭔가에 대해 "그걸 계속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란 질문에 "재밌잖아요"라고 단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행복한 사람일테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게 취향, 취미에 있어서 내 법대로 사는 모습이 아닐까.






김마이너가 사는 법 제1조 : 취향과 취미는 사회의 인식,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 말고, 생겨먹은 대로 그냥 내 마음이 끌리는 것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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