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저도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
입사하고 몇 개월 뒤부터인가. 사무실에는 새로운 얼굴이 보였어. E선배의 오랜 지인들이었지. 회사에 일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식구들이 생겨난 거야.
겨울날에 M선배가 왔고, 다음 해 뜨거운 여름날 N선배가 왔고, 날이 차질 때 A선배가 왔어.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이어서 꼭 '박이 씨'라고 불렸는데, 다른 선배들은 알던 사이니까 이름을 부르는 일이 잦았어. 근데 그게 약간 서운하더라. 뭔가 벽이 있는 것 같잖아! 그 앳된 마음이 보여서 그랬을까. 선배들은 나를 참 잘 챙겨주었어.
M선배는 숫기 없이 일만 하던 내게 먼저 관심을 표해 주셨어. '취미는 뭐야? 좋아하는 게 뭐야?' 하면서 하나하나 물어봐주고, 기억해 주었어. M선배가 오기 전에는 회사가 참 어려웠는데, 선배가 살갑게 대해주시니까 나도 정을 붙이게 되더라고.
M선배가 E선배에게 ‘오늘 카페 가면 안 돼요?’하고 물으면 E선배가 못 이기는 척 카페에 데려다주었는데, 그때 얻어 마시던 밀크티가 얼마나 맛나던지. 아끼고 아껴서 한입씩 마시고, 꼭 테이크 아웃 컵으로 바꿔 가져가곤 했어.
일 하다 보면 알지? 물도 못 마시게 정신없잖아. 그러면 포장해 온 아이스 밀크티는 얼음이 녹아 맹맹한 밀크티가 되고, 따뜻한 밀크티를 포장해 오면 다 식어서 떫은맛이 난다? 근데 그게 또 너무 아까운 거야.
그러면 맹맹한 밀크티에 얼음을 잔뜩 넣어서 얼음 맛으로 마셔버리고, 따뜻한 밀크티는 전자레인지에 아주 뜨겁게 데워서 홀짝홀짝 마셔댔지.
여유가 있는 날, 점심시간이면 M선배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어.
- 박아. 우리 오늘 카페 가자!
그러면 입이 귀에 걸렸으면서 마지못해 가야 되는 것처럼 대답하며 카페에 갔어. M선배는 카운터에서 이렇게 말했지.
- 라테 아이스 하나요.
주문할 때 보통 음료의 온도를 앞에 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한’ 아메리카노라고 말하잖아. 근데 M선배는 꼭 라테 ‘아이스’라고 말했어. 실수로라도 아이스 라테라고 하지 않더라. M선배가 주문할 때 ‘라테 아이스’라고 동시에 대답하면 알 수 없는 쾌감이 밀려왔지.
항상 테라스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햇빛도 맞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점심시간 1시간이 꼭 몇 분 지나 있는 거야. 그러면 M선배의 단골 멘트가 또 나온다?
- 우리 10분에 일어날까?
바쁘지 않은 날, M선배와 나 둘이서 몰래 점심시간 10분을 더 쓴다는 게 얼마나 큰 일탈이던지. 이 짜릿한 밀담은 다른 분들이 안 계실 때만 했는데, 사무실에 돌아가면서 그 짧은 시간에 누가 오진 않았는지. 사무실 대문을 열면서 신발이 있는지 보는 게 그렇게 짜릿했어.
지금은 복지 차원에서 스낵박스가 있지만 그때는 스낵박스 같은 거 없었거든. 커피 원두랑 슈퍼에서 사 온 보리차 티백이 전부였어. 일하다 보면 입에 단 게 당길 때가 있잖아. 그러면 은근슬쩍 N선배한테 말을 거는 거야.
- 선배. 저랑 아이스크림 내기 하시죠.
그럼 N선배가 기지개를 켜면서 ‘그래 아우야. 가위바위보로 하자.’하면서 꼭 가위바위보를 했어. 그러면 높은 확률로 내가 져. 내기에 졌으니 내가 사드려야 하는데, N선배가 카드 리더기에 본인 카드를 꽂으며 ‘아우야. 형밖에 없지?’하면서 으스댔어. 그러면 또 말해야지. ‘감사합니다! 형님!’
언제 한 번은 야근하느라 피곤해서 편의점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 보자 했지. N선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가 살게. 내가 살게.’하면서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헐겁게 꽂더라고. 이런 수에는 당해줄 수 없어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카드를 끝까지 밀어 넣어 줬어. 사무실에 돌아와 비싼 아이스크림 노나 먹는데 N선배가 그러더라고.
- 아, 더럽게 맛있네.
A선배는 스타벅스 마니아였어. 개인 머그컵도 스타벅스 컵이고, 겨울철만 되면 꼭 프리퀀시 적립도 해서 다이어리는 스타벅스 다이어리였지. 그래서 그런가. A선배는 항상 스타벅스 커피를 사줬어. 매번 사주시니까 받아먹는 사람도 미안하잖아. 카운터 앞에서 머뭇대면 그 말을 하더라.
- 내가 커피 사주는 값만큼 나는 꼬장을 부릴 것이니 맛있게 먹어라.
그 말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래서 A선배가 꼭 날 놀려댈 때면 마음속으로 생각했지. ‘저번에 마신 차이 밀크티 그란데…. 저번에 마신 차이 밀크티 그란데….’
어느 날은 A선배랑 둘이 현장 근처 스타벅스에 간 적이 있는데, 한 번은 내가 사드리고 싶더라고. 그래서 ‘선배. 제가 사드릴게요!’하고 의기양양하게 주문하고 종업원분께 결제 카드를 드리려 했다? 웬걸. 선배가 ‘쪼그마한 게 어딜!’이라 말하면서 날 몸으로 밀치는 거야. 나 그때 처음 알았잖아. 성인 남성한테 밀리면 2미터는 밀리는구나 하고.
선배들은 꼭 작당모이라도 한 듯 날 놀려대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 날은 너무 서럽더라고. 그래서 확 울어버렸지! 그랬더니 ‘누구 때문에 운 거냐.’면서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하는 거야. 그 모습이 어처구니없고, 웃겨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니까.
꽤 오랜 시간 애정 어린 내리 갈굼을 당하니까 드디어 내게도 후배가 생기더라?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지.
어느 날은 점심시간 10분 지나서까지 카페에 있고, 또 어느 날은 결제카드가 정해져 있는 아이스크림 내기도 해주고, 또 어느 날은 ‘꼬장 값이다.’하면서 커피 사줬어. 역시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