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잖아. 가끔은 너무 사소해서 상대방은 기억도 못하는 순간들.
M선배가 그 말을 하더라고. 제안서를 인쇄했는데, 인쇄가 다되었을 때쯤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니까 내가 인쇄물을 들고 왔다고. 그 인쇄물을 검토하고, 클립을 끼우려고종이를 탁탁 쳤대. 근데 내가 클립을 들고 씩 웃으며 오더래.그 모습이 기억이 난대. 정작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M선배는 기억할까? 넣을 건 많은데 공간은 좁은 평면 설계를 해야 했어. 처음 해보는 평면 설계였지. 처음부터 기가 막히게 잘하면 좋을 텐데.알잖아? 처음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거.
설명하는데 입이 바짝바짝 마르더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설명하면서 별로인 게 느껴져서 너무 창피한 거야!그랬더니 선배가 작게 숨을 고르고 말하더라고.
- 박아! 이번 일은 네 장점이 100번 발휘되어야 해.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너의 그 섬세함과 예민함을 가득 담아봐. 그러면 돼.
선배 말을 들으니 콱 막혔던 속이 풀리더라고. 내 장점을 알고, 기다려주는 선배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던지. 입술을 꽉 씹었다가 ‘네!’ 하고 대답했어.
자리에 돌아와 선배의 말을 되풀이하며 생각했어.
창문과 차 마시는 곳이 가깝네. 풍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 눈 마주치면서 차마 시기라니 너무 싫다! 음, 벽이 있지만 옆 방 붙박이장 닫는 진동이 느껴지면 신경 쓰이겠는데? 소리가 나는 곳들을 모아서 배치해야겠다. 마사지받을 때 시야에 문이 있으면 불편하더라. 마사지에 집중할 수 있게 문은 손님 등 뒤로 보내야지. 집기 나와있는 거 너무 꼴 보기 싫어! 다 숨길 거야. 다 숨겨서 의도한 것 말고 아무것도 안 보이게 할 거야.
트레싱지 몇 장을 구겨 버렸고, 손은 연필 자국으로 새카메지는데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지더라고. 한참을 용쓰고 있으니까 선배가 입꼬리를 올렸다가 숨을 들이쉬고 말하더라고. "음! 잘하고 있네!"
그 말에 또 꼬리 프로펠러 돌리면서 열심히 작업했었잖아. 이렇게 장점을 봐주고, 부드럽게 리드해 주는 선배가 있는 반면 참 어려운 선배도 있었어. E선배!
E선배는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다시’를 반복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가끔은 너무 얄궂을 때도 있지만 그날을 생각하기도 해. 여름쯤이었나. 보통 선배들과 함께 일을 했었는데, 혼자 하는 프로젝트였어. E선배에게 몇 가지 이미지를 가져갔고, 선배는 이미지를 참고해서 만들어 보라 했지.
열심히 키보드 두들기고 클릭질하면서 만들었는데 ‘다시 퍼레이드’가 시작된 거야! 내 눈에는 이미지랑 비슷한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선배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가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했어. 그랬더니 이미지를 켜고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더라고.
- 너 이 이미지가 왜 좋다고 느낀 줄 알아? 걸레받이 하나로 이야기 해볼까. 보통 걸레받이 높이 100mm 쓰지. 네가 가져온 이미지들 걸레받이 높이 몇처럼 보여?
- 이 사진은 200mm도 넘을 것 같고, 이 사진은 10mm도 안돼보여요.
- 그래. 일반적인 사이즈는 아니지? 우리가 눈에 쉽게 볼 수 있는 사이즈와 비례는 안정감을 주는 반면에 새롭지 않아. 이렇게 눈에 익은 비례를 깨야 쉽게 ‘새롭다.’고 느끼는 거야. 기능이 있는 곳도 아니니 정형화된사이즈가 필요 없지? 그러면 용도에 맞춰서 과감하게 비율을 건드려야지.
그제야 알겠더라고. 내가 작업해 온 건 별 다른 이유 없이 달달 외워댔던 사이즈들의 종합이었구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 너 신입의 특징이 뭔지 알아? 하나 알게 되면 그것만 주야장천 보고 다니는 거. 그래서 나도 한동안 걸레받이 높이만 열심히 재고 다녔잖아. 웃기지. 이 날이 너무 생생해서 선배의 ‘다시 퍼레이드’가 마냥 얄궂지는 않더라고. 선배들은 기억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