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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Nov 17. 2021

비움에 대한 망상

11/16/21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라는 드라마만큼 우리 집엔 내 짐이 정말 적다. 전부 남편 거. 자잘한 물건들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10년 20년 된 물건도 잘 작동하니 절대 안 버린다. 나도 잘 쓰고 있는 물건들은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인데, 다만 살면서 그다지 필수품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짐이 별로 없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요즘 또 내가 비우기에 시동이 걸려서 그 없는 짐 중에서도 이것저것 싹 다 갖다 버리고 싶다. ㅋㅋㅋㅋㅋ 나는 주기적으로 갑자기 쇼핑 욕구가 치솟아 잔뜩 사다 모으고 또 갑자기 싫증이 팩 나버려 죄다 갖다 버리고 또 갑자기 사고 비우고 난리 부르스를 피워댔었다. 그나마 경험치가 쌓이면서 그 횟수나 빈도가 굉장히 많이 줄고, 또 비운다고 신경 쓸 거 생각하면 이제 더 살 것도 사실 없다. 그래도 가끔씩 마음이 허하고 뭔가라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 때도 있다.


요즘 나의 레이더에 포착된 물건은 바로바로... 졸업 선물로 받은 가방, 작년에 산 머리도 말리면서 빗기도 한다는 획기적이라고 느껴졌던 브러쉬드라이기, 그리고 모든 음식을 맛있고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에어프라이어.


패션은 매년 바뀌고 새로워져서 의류나 악세사리, 가방, 구두 등은 어쩔 수 없이 유행을 타게 된다. 그리고 나도 매번 보는 눈도 다르고 취향도 바뀌고 해서 자꾸 욕심을 내는 것 같다. 다만 욕심을 내는 만큼 그다지 패셔니스타가 안된다 뿐이지. ㅋㅋㅋㅋ 옛날에는 유행에 맞는 싼 옷들을 많이 사서 종류별로 입었다면 요새는 오래오래 입을 수 있는 클래식한 상품들을 제 가격에 사는 게 더 좋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ㅜㅜ 이제는 그냥 대충 편한 게 최고다.


이제는 물건을 사는 이유도 내가 꼭 필요해서 사게 된다. 그냥 예뻐서, 좋아 보여서, 남들 다 하나씩 갖고 있어서 사는 것보다 우리 집에서 어떤 용도로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활용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쇼핑도 하면 할수록 늘고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수록 더 좋은 물건을 찾아낸다. 어쩔 땐 그 모든 과정이 너무 귀찮고 시간낭비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쩔 땐 그게 그렇게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리도 안 아프고 구경하는 데 빠져있을 때도 있다.




나도 옛날에는 물건을 버리지 못해 쌓아 두고 살았던 때도 있었고 이것저것 싹 다 비워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됐을 때도 있었고 아무튼 왔다 갔다 했다. 나름 비우는 데 도가 텄다지만 내가 가장 고민하는 것들은 편지나 사진, 그리고 선물 받은 물건들이었다. 이곳은 여전히 손글씨로 적은 편지와 카드를 우편으로 보내신다. 우편으로 보내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기술 발달에 맞춰서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고 영상통화도 하고 그리고 또 정성을 담아 편지도 보내고 카드도 보내고 자잘한 물건들을 택배로도 보내신다. ㅜㅜ 


그래서 신혼 초에는 그 자잘한 물건들에 쌓여 안 그래도 집도 좁은데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벽장식이고, 꽃병이고, 편지고, 스노우볼이고, 기타 온갖 잡동사니들 전부 다 내 취향도 아닌데 집에 떡하니 널려져 있으니 그 집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몇 달을 고민하다가 부부싸움 후에 홧김에 싹 다 치워서 남편 서랍에 놓았다. 그리고 나니 숨이 좀 트였다.


물건이 주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 아끼는 물건 애지중지 하는 물건들은 존재 자체로도 나에게 힘을 주는데, 내가 싫어하는 물건들은 집 안에 아무리 꽁꽁 숨겨두어도 그게 우리 집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부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물건들만 남겼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지진이나 쓰나미 났을 때 금방 챙겨서 도망 나올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나니 내 삶에 중요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있다. 코딱지 만한 우리 집도 월세만 한화로 치면 150만 원이 넘게 내는데, 내가 싫어하는 물건들을 쌓아두면 내 집이 아니라 물건 집이다. 월세는 내가 내는데 물건에 쌓여 있으면 안 된다. 지금 집을 최대한 넓게 잘 활용해서 쓰는 게 나에게는 이익인 것이다. 우리는 집은 좁지만 나름 도심에서 살다 보니 근처에 음식점이나 마트가 가까워서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 생필품들도 대용량이라도 적당한 양으로 사서 다 쓰면 채워 넣는다. 통조림이나 캔 음식 등도 적당히 식품들도 적당히 냉장고도 작아서 어차피 많이 쌓아두지도 못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였나, 엄마가 산타할아버지가 전화로 뭐 갖고 싶냐고 물어봤다고 해서 다이어리를 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 건 핑크 핑크하고 표지에 쿠션도 들어가 있고 속지까지 꾸밀 수 있는 공주 풍의 육공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그날 밤 아빠가 검은색 바탕에 고양이가 그려진 세로로 긴 회사 수첩이랑 비슷한 모양의 다이어리를 사 가지고 오셨다. 그게 젊은 아빠가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퇴근하시면서 들른 문구점에서 살 수 있었던 가장 귀엽고 깜찍한 수첩이었겠지...만 나는 그 수첩을 몇 장 안 썼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애기라 내가 딱히 다이어리에 끄적일 만한 뭐 그런 건 없었다. 초딩이 스케줄을 관리할 일이 뭐 있겠으며 월간 주간 일간으로 얼마나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암튼 그 뒤로도 나의 까탈스러운 취향은 계속되어 누가 좋은 마음으로 정성 어린 선물 해줘도 맘에 안 들면 안 썼다 ㅠㅠ. 선물을 해준 것 자체로도 얼마나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나를 생각해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고르고 포장하고 나에게 주면서 내가 잘 쓰기를 바라는 그런 상대의 마음을 잘 받아들여야 했는데. 친구들이 준 선물도 사실 잘 활용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선물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얼굴 한 번 더 본다던지 맛있는 식사를 한 끼 같이 한다던지 생일 파티를 한다던지 여행을 간다던지 그렇게 시간을 내서 만나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 게 선물을 골라서 좋아할까 싫어할까 마음 졸이며 고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다. 어차피 특별한 일 아니면 자주 보지도 못하니까ㅠㅠ.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선물을 주실 때에도 내가 고르게 해 주셨다. 옷을 살 때에도 함께 쇼핑을 가고 그때 골랐던 옷들은 정말 몇 년을 연속으로 낡고 닳을 때까지 엄청 잘 입었었다. 내가 대학교 졸업하면서 선물해주신 노트북은 대학원에서도, 강의할 때도, 공부할 때도, 글을 쓸 때에도, 몇 번의 수리를 거쳐 거의 7년을 함께 했으며, 내가 이제까지 썼던 핸드폰 여럿도 카톡 하고 SNS 하고 해외로 한국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매일매일 엄청 잘 쓰고 있다. 우리의 결혼반지도, 내 유일한 목걸이도, 하나뿐인 시계도, 내가 입는 옷들도, 작년에 새로 깔맞춤 한 노트북과 핸드폰과 에어팟도 전부 선물 받아 감사히 매일매일 잘 쓰고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그 물건을 사주시며 내가 잘 쓰면서 행복하길 바라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사실 많은 고비가 있긴 했다. 대학교 입학 선물로 아빠가 주신 브랜드 가방은... 사실 중고로 팔아서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잔뜩 사서 그 해 겨울 엄청 잘 입고 다녔다. 스웨터 카디건 같이 생긴 정말 특이한 모양의 겉옷과 작은 꽃들이 잔뜩 프린팅 된 스카프 그리고 빈티지한 갈색 가죽 가방까지. 세트로 엄청 입고 다니고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은 맘에 쏙 들었었다. 어쨌든 그것도 다 비워 사진 속에 기억 속에만 있긴 하지만 ㅋㅋ 그리고 다른 가방 신발 전자제품 악세사리 등등 이제까지 내가 선물받은 대부분의 물건들과 전부 작별인사를 했다 ㅠㅠ 하지만 선물주신 분들의 마음은 사진으로도 남겨놓고 전부 기억한다. 다만 내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더 좋은 주인을 찾아준 것 뿐 ㅠㅠ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많은 것들을 비우고도 속은 편하다. 사실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선물 주신 것도 내 맘대로 했는데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고 그 불편한 마음을 참으며 쩔쩔맨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남편과도 잘 대화하고 남편도 내 의견을 존중해 줘서 합의점을 찾았다. 




일기를 쓰다 보니 지금 내 위시리스트에 담겨있는 그 물건들도 사실 나에게는 전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물건을 구입함으로 인해 어떤 인생이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사실 에어프라이어를 산다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그 음식을 준비하는 귀찮은 과정을 내가 직접 해야 한다. 그럴 바엔 외식을 하거나 사 먹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브러시 드라이어를 산다고 내 머리가 자동 세팅돼서 윤기 좔좔 흐르지 않는다. 그 귀찮음을 이겨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머리숱도 많은데 머리 감고 한 시간 동안 드라이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물건들을 사는 것보다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계획을 한 번 세워봐야겠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다니기. 일단 머리로는 접수했는데 귀차니즘을 이겨내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데... 새해..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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