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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Oct 15. 2021

말!말!말! 어떻게 말할까? or 어떻게 들을까?

그래머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사람들의 열망과 삶을 반영하고 어느 지역의 풍속과 세태를 보여주고 한 세대를 아우르는 유행과 정체성을 표현해준다. 언어는 사고를 형성하고 언어가 발전된 만큼 사고의 범위와 깊이를 넓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한국어 언어유희가 있다. 사투리 유행어 등등 나는 너무너무 재밌고 좋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는 정이라는 느낌도 우리는 아니까.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표현, 그 상황에서 대부분이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비꼬고 돌려말하는 것도 알아듣는 사람이나 알아듣지. 돌직구로 말해도 비꼬아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 때 유행했던 프로포즈 멘트인 내 아를 나아도 역시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형화된 가정의 모습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고, 너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고 그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마음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겟다는 아주 깊은 뜻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대리모를 원하냐고 아니면 여자가 애 낳는 기계냐고 듣기 싫어할 수도 있겠다.


경상도 사투리의 쫌! 이 한 단어로 압축되어 표현할 수 있는 수십가지의 감정도 우리는 아니까. 충청도 사투리의 무심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표현에 더해서 본능적인 유머감각에 센스넘치는 표현까지.ㅋㅋ 암튼 이거는 진짜 원어민 아니고서야 아무리 공부해도 실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안나온다. 나도 좀 위트있는 발언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는 내가 한국인으로서 눈치나 센스가 있다고 착각했었는데 성인이 되어 한국에서 조금 살아보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의 기준에서는 아주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그래도 뭐 어쩌겠느냐만은, 주위 사람들께 본의 아니게 의아함을 드렸을 것 같아 죄송스럽긴 하다.


그런데 정말 알 수 없는 점은 딱 그 상황에서는 그냥 나에게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고 상대의 반응에 내가 놀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 이 사람도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라고 이해하게 된다.




5년 전, 한국 직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20대 초반 대학생들을 관리하는 업무가 있었다. 그 때 무단 지각, 무단 결석, 무단 이탈이 많아 특정 날짜에 일을 못하거나 특정 시간에 자리를 비우게 되면 나에게 얘기 해주고 가라고 전달했었다. 사무실에 있어야 할 인력이 있어야 되는데 없으면 일을 내가 해야 하니까. 그런데 한 일주일 뒤 알게된 사실. 그 학생들이 사실은 뒤에서 내 욕을 하면서 "얘기하고 가라는 게 가지 말라는 소리지" 라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불평을 했던 것!!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인생의 2/3을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인 친구도 많기 때문에 한국의 최신 유행이나 문화도 상당히 익숙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나와 5살도 차이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는 얘기하고 "가라" 라고 했던, 허락받고 가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알 수 있게 나에게 통보하고 가라고 했던 의미가 정반대로 "가지 말라"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아니, 어떻게 가라고 말했는 데 가지말라고 알아듣지? 그것도 나한테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뒷담화를 하다니. 나한테 물어봤으면 설명이라도 해줄텐데. 아니 그리고 시급 받고 일하는데 근무시간에 자리 지키는 게 일인데, 일을 안하고 외출을 한다거나 하면 그거는 말해줄 수 있는 일 아닌가? 시급을 깎는다는 것도 아니고 관리자에게 알리고 갔다 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무리 그 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인들이 셀프로 특혜를 누린 것이지 그게 당연한 건 아니지 않나. 정해진 근무시간에 근무하면 시급받는다는 노동법은 무시할 수 있으면서, 일개 직원인 나에게 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나? 나는 정말 이해가 안갔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한국에서 진행되는 어느 온라인 수업을 들으려고 했을 때 이 학생들이 왜 그렇게 느꼈을 지 약간은 알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그 수업은 40~50만원 대의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긴 했지만 특정한 경우 추가요금을 내면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추가요금이 백만원 단위로 커지더라도 감수하고 수업을 들을 의향이 있었고, 처음 신청할 때 부터 말씀을 드렸었다.


그 때는 추가요금을 내면 가능하다고 답변을 들어서 그냥 단어 그대로 가능한 줄 알았는데, 수업을 수강하면서 보니 강사님께서 그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신 건데 내가 눈치없이 못알아 듣고 신청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굉장히 미묘하고 사소하고 애매해서 어떻게 딱 집어 말로 설명할 수 는 없는데, 내가 2~3백만원을 내고 4~50만원짜리 수업을 듣는 느낌? 된다는 말이 안된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아 일부러 이렇게 행동하셔서 그냥 내가 알아서 먹고 떨어지길 바라시는 건가? 이게 기백만원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수업인가? 싶은 느낌.


그래서 5년 전 그 학생들이 그렇게 느꼈으려나? 아니 대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경험을 했길래 긍정문을 꼬으고 꼬아서 부정문으로 들을까? 그 학생들도 내가 느꼈던 저 부정적인 인상을 받아서 그게 당연해진 걸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된다는 거를 된다고 설명해야 할까? 진짜진짜 된다? 진짜 거짓말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된다? 그리고 상대가 된다 했을 때 진짜 되는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된다고 해서 내가 진짜냐고 계속 묻는것도 오히려 그 사람의 진심을 의심해서 캐물어 보는 것 같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냥 된다가 된다라는 의미로, 안된다가 안된다는 의미로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그러면 잘못 알아듣는다. 의도치 않게 오해가 쌓일 수도 있다. 진심은 진심으로, 거절은 거절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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