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
"오, 얘네 귀엽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봐."
제법 따뜻해진 3월의 어느 날, 작은 천막 부스 앞에 올망졸망 늘어서 있는 다육식물들 앞에서 발을 멈춘 나를 보고 다육이들은 오들오들 떨었을 것이다. 내게서 느껴지는 불온한 오오라를 본능적으로 눈치챘겠지. 그런 다육이들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남편은 마음에 드는 아이를 골라보라고 했다. 반짝 화색을 띄우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누굴 데려갈까, 이 아이, 저 아이 주의 깊게 살펴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내 손을 거두고 일어섰다.
"아냐, 됐어. 가자."
"왜? 키친 카운터에 다육 화분 더 들여오고 싶어 했잖아."
"어, 그치만..."
식물은 손대는 족족 요단강을 건너 보냈다. 첫 번째 희생자는 학생 때 불어온 허브 붐에 편승해 시장 꽃집에서 사 왔던 로즈마리, 다음은 버스를 기다리다 산 싱고디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식물이란 아무 데나 놓아둬도 물만 주면 알아서 사는 강인한 생명체인 줄 알았다. 식물의 생태를 연구한 적 없는 우리 할머니가 텔레비전 다이 옆의 선인장 키를 티브이 높이만큼 늘려놓았던 것처럼, 식물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 엄마가 화분의 관엽식물 가지를 꺾어 갑자기 물컵에 꽂아 넣고도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설령 내가 잘 못 돌보았다 하더라도 식물은 저절로 물을 차단하고, 형광등 빛이라도 주워 광합성해 가며, 어떻게든 살아남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이 닿은 그들의 생명력은 점차 누런 빛으로 꺼져 들어갔다.
그때 처음 알았다. 식물을 기르는 데에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것과 하필이면 나의 재능은 식물을 골로 보내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말 못 하는 식물이래도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뒷맛이 씁쓸하다. 지옥의 왕 하데스도 못할 노릇이겠구먼, 말라비틀어진 사체를 뽑아내며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거 키우지 말아야지.
식물은 키우지 않겠다는 결심을 무너뜨린 것은 완두순이었다.
일본의 슈퍼마켓에서는 완두콩에 싹을 틔운 완두순(豆苗, 토묘)을 뿌리째 포장해서 판다. 한번, 또는 두 번에 나누어 볶음요리에 쓸 수 있을 정도의 양에 가격도 저렴한 100엔 전후. 특유의 풋풋한 향미와 아삭한 식감이 좋아 종종 사다 먹었는데, 싹을 잘라먹고 난 뿌리를 물에 담그면 이모작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게 되겠어? 반신반의하며 그릇에 물을 붓고 담가 두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것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새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100엔 주고 한번 먹을 거 이렇게 하면 두 번 먹을 수 있다니. 안 하면 손해다. 한 달 식비를 혼자서 6만 엔씩 쓰면서도 50엔, 100엔 아껴보겠다고 완두순의 이모작을 시작했다. (절약이 목적이라면 외식을 덜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완두순 이모작을 즐기던 나는, 이후 당근을 기르게 되었다. 정확히는 당근 머리. 카레를 만들려고 샀던 당근을 너무 오래 묵혀 두었더니 냉장고 안에서 싹이 났는데, 저는 살겠다고 싹까지 틔운 것을 인간이 쉽게 잘라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기 미안해 간장종지에 물을 받아 담가두었더니 제 살을 양분 삼아 울창한 당근나무(?)가 되었다. 3개월 넘게 살아남은 당근나무는 당근 본체가 시커멓게 색이 변하고 문드러지는 좀비가 되고 나서야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화분도 없고 흙도 없는 집이라서.
식물을 기르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딱히 열정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난 싹에 대한 측은지심, 또는 검약 차원. 그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당근을 떠나보내고 설거지를 하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어째 좀 허전했다. 주방에 설 때마다 자연스레 눈이 닿던 자리에 있던 녹색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헛헛했다. 풀, 그게 뭐라고.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까 무생물로만 가득 찬 이 공간이 너무 휑하고 삭막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반려식물을 두었으면 좋을 뻔했다. 잠깐 왔다 사라지는 그런 당근 말고.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두순과 당근들, 연달아 이루어 낸 성공으로 식물을 기르는 일에 약간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식물이 있어야 할 것 같다'라고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나보다 먼저 일어나 당근의 물을 갈아주던 사람이었다.
"여보, 근데 풀 뭐 길러본 적 있어?"
"아니."
"나는 죽이기만 몇 번 해봤어."
내 말에 남편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후로 우리는 몇 번인가 더 카레를 해 먹고, 카레를 해 먹은 횟수만큼 당근나무를 길렀다. 항상 마지막은 '좀비당근 엔딩'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녹색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재작년 생일, 식물원에 갔다가 기념품 코너에서 본 다육식물 화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관리가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게다가 콩알만 한 화분 안에 새초롬하게 심겨있는 다육식물들이 어찌나 아기자기 귀여워 보이던지. 당근의 빈자리에 갖다 두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기껏해야 완두순이나 당근 같은, 채소계 수경재배 밖에 안 되는 집이다. 뿌리가 달리고 흙에 담긴 건 얼마 안 가 다 죽여버린 기억 밖에 없다.
이런 건 길러본 적 없는데.
하지만 귀여워.
또 금방 죽일 것 같아.
다육식물은 선인장 비슷한 과라 물 안 줘도 산대.
로즈마리도 초보용 허브래서 샀는데 순식간에 보내드렸어.
박 터지는 내적갈등 속에 한참을 번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화분을 하나 골랐다.
다육식물은 최고였다. 당근이 있던 자리에 올려놓자 마치 거기가 원래 제 자리였던 것처럼 찰떡같이 들어맞았다. 이 쬐그마한 것 하나의 등장으로 거실과 주방 전체가 화사해진 것 같았다. 어떻게 식물이 이렇게 오동통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겼을까. 한번 사로잡힌 눈길은 좀처럼 떼기도 어려워,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다육이와 함께 앉아 이파리 표피의 결까지 눈으로 따라 훑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각 잡고 물을 줄 필요도 없는 데다 창가에서 커튼을 맞고 떨어진 이파리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 화분 받침 위에 올려두었다가 버리는 걸 깜빡했는데, 어느 날 거기서 새싹이 돋아났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꿈꿔오던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집사의 능력과 관계없이 저절로 자생하는 슈퍼 식물.
그렇게 기르던 총 여덟 뿌리, 여섯 종류의 다육 중, 1년 5개월 후 살아남은 것은 단 두 뿌리뿐이다. 그나마 하나는 키만 삐쩍 키웠고 다른 하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귀엽고, 입수도 쉽고, 키우기도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다육식물은 굉장히 까다로운 식물. 1년 반동안 갖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나서야 알아챘다. 다육식물 기르기는 쉽지 않고, 나는 역시 재능이 없다.
다시 한번 우리 집 키친 카운터는 황량해졌다.
"이히히, 신난다."
한참 갈등하던 것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부스를 뒤돌아 섰다. 기분 같아선 왼쪽으로 투스텝, 오른쪽으로 원스텝, 신나서 두기둥기 뛰어가고 싶지만 손에 들린 반투명 비닐봉지 속 비좁은 두부용기 안에선 작은 다육포트 셋이 저들끼리 스크럼을 짜고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사고 말았다. 또다시 죽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보다 뉴 페이스 다육이들과 펼칠 일상에 대한 기대가 이겼다.
"그렇게 좋아할 거면 진작 사지 그랬어."
"엄한 애들 또 죽일까 봐 무서웠단 말이야. 근데 나 결심했어."
"뭘?"
"이번엔 공부하면서 기를래. 절대로 죽이지 않을 거야."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간단하던 식물생활이다. 게다가 다육이는 기르기도 쉽지 않지만 한번 그 매력에 빠지면 빠져나오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죽게 하지 않겠다고, 나를 믿고 살아갈 다육이들과 함께 나 또한 식집사로서 성장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새 친구들을 들여왔다.
나는 과연 이 다육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초보 식집사의 고군분투 다육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