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 공공기관의 '30년 스토리북'의 집필 작가로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책이 나왔던 터라
참고할 자료가 충분하고
페이지 분량도 많이 요구하지 않아서
3개월 남짓이면 끝날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프리랜서에게 일감 제의는 달콤하게 들리지만
곧 당황스럽고 불안해지며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가 돼서야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도 다른 제안을 받을 때면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라는
마취제가 머릿속에 투여되는 것 같다.
이 프로젝트 역시 그랬다.
3개월만 고생하면 뿌듯한 스토리북을 만질 수 있다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책의 목차를 잡아가는 시기에 그녀와 마주했다.
스토리북 콘셉트에 관한
편찬위원회 회의가 열리던 날이었다.
디자인 회사 관계자들과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찬 바람을 내며
우리들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에 있던 서류를 쳐다보며
“그거예요?"라고 짧게 묻고 종이를 낚아챘다.
몇 장 넘기던 그녀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일 안 하셨네요!
우리 쪽 기관 직원들이 일 안 했다고
그쪽 디자인 회사에서도 일 안 한 거예요?"
억울한 마음이 먼저 차올랐다.
이 자료를 만들기 위해 한 달 넘게 고민했고
기관 직원들과도 이미 공유한 상황이었다.
그사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녀는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당당하게
야단 칠 수 있는 것일까?
황당함에 제대로 대꾸도 못 한 채
그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만 커졌다.
"대체 저분 누구세요?"
옆에 있던 팀장님도 "모르겠어요. 기관 담당자인가?"
모르는 사람이 훅 던진 말에
우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기분을 추스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시작된 회의.
그녀는 위원들에게 자신을 출판위원회 간사로 소개했다.
출판을 총책임질 기관의 실장이었던 것이다.
나와 디자인 회사 관계자들 빼고는
위원들과 모두 아는 분위기 속에
출발이 꼬인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는 외부 위원들에게
출판 초기라 콘셉트에 고민이 많다며
내용이 부실해도 이해해 달라고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동의를 구했다.
첫인상이 유쾌하지 않았던 그녀와
프로젝트가 연장되며 10개월 가까이 같이 일했다.
많은 아이디어와 노력을 요구했고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어려우면 끊임없이 대안을 요구하는
그녀의 컨펌을 받아내기 위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시간들이 지나갔다.
다행히 마무리할 때는 서로 웃으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그것이 마지막이 되길 바랐다.
동료들끼리 흔하게 질문했던 선택지가 떠오르며 말이다.
“일 잘하는 사람이랑 팀이 되면 좋을까?
아니면 실력은 떨어져도
인간적인 사람이랑 일 할래?”
이 일을 겪고 난 후 대답에 망설임이 줄어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