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영웅도 비정규직인가요, 맛탱이 가버린 영웅
영웅은 사회의 입맛에 따라 그때그때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존재다. 여러 조건들이 부과된 환경, 찰나의 순간, 하나의 이야기에선 그 무엇보다도 찬란한 빛나지만, 그 무대가 끝이 나면, 주어지는 대본에 따라 갑옷을 버리고 승복을 입기도 해야 하는 단역 배우들. 그 찬란한 빛은 어디까지나 불에 매료된 불나방들의 춤이다.
그러하니, 영웅을 볼 때는 길게 봐야 한다. “오래오래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한 번의 게임이 아니라, N번의 게임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때 과연 그들은 몇 번이나 되풀이할 수 있을 것인가. 몇 번이나 자기를 망가뜨리며 괴팍한 입맛을 가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역대급 배트맨 시리즈로 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는 영웅들의 스펙타클한 활약 이후를 잘 보여준다. 시리즈의 마지막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조커와의 싸움으로 사랑하는 레이첼을 잃고 삶의 목적을 잃은 채 수년째 저택에 틀어박혀버린 히키코모리로서, 지금까지의 격한 싸움으로 온몸이 넝마가 되어 걸을 때 지팡이를 달고 다녀야 하는 폐인으로서의 브루스 웨인을 조명한다.
브루스 웨인과 함께 범죄를 척결하여 고담 경찰청장에 오른 제임스 고든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달라졌다. 그는 이제 다가오는 봄이 되면 잘릴 예정이었는데, “영웅을요?”라고 반문하는 이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간다. “전쟁 영웅이지, 지금은 평화롭잖소”
전 세계 신화 속 영웅들을 서번트로 삼아 그 어떤 소원도 이뤄준다는 성배를 얻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는 일본의 라이트노벨 ‘Fate/Zero’(비주얼노벨 게임제작사 Type Moon의 간판작 ‘Fate/Stay night’의 프리퀄) 또한 이 N번의 게임 속에서의 영웅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에미야 키리츠구는 마침내 성배와 조우하고 소원을 이루기에 앞서 환상 하나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환상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대를 위한 소를 희생시키는 등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던 그의 사고방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300명이 탄 배와 200명이 탄 배 중 너는 300명이 탄 배를 구할 것이다. 다시 200명이 탄 배와 100명이 탄 배 중 너는 200명을 구할 것이다. 다시...
그 끝없이 반복되는 논법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이를 행복하게 해주고자 했던 정의의 사도로서의 소원과는 다르게 그 모두를 몰살시키는 결말을 초래한다. 사실 이 성배라는 물건은 이미 오래전에 오염되어 악의적으로 그 소원을 비틀어 버리긴 하지만, 그 논법을 가만히 보면 이게 그렇다고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다.
반복되는 시간은 그렇게 바람이 바위 깎듯 영웅을 마모시키고, 세상은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진 영웅을 본래 있던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영웅의 끝없는 활약은 어디까지나 건물이 무너질 정도로 세게 쳐 맞아도 척추 골절 따윈 1도 없게 해주는, 다 좋게좋게 해주는 무적의 작가 실드 덕분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처는 전쟁의 개시, 수행 그리고 종결에 있어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다’는 말이 유명한데, 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영웅에 대한 요구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언제고 더 쉽게 밀어낼 수 있도록.
사실 이렇게 탄환처럼 소모되는 게 영웅의 본질이라면, 굳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밀어낼 필요도 없다. 가장 베스트는 한 번의 게임에서 영웅을 끝까지 우려먹고 용도폐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영웅을 시대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보단 그때그때 새로운 영웅을 들이는 게 편하고 깔끔하다. 어차피 찾다 보면 영웅은 나오게 되어 있, 영웅 꿈나무는 많고도 많다. 그러니 허들을 높여도 충분하다.
“영웅으로 죽거나,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할 때까지 살아남거나”라는 다크나이트의 명대사는 기껏 불난 거 구해주려 왔더니, 내 집도 구했어야지라고, 더 내놓으라고 악을 쓰는 세태에 대한 환멸일 것이다. 영웅은 저 불 속에서 타 죽어버려야 한다. 우리나라 1세대 판타지소설 ‘비상하는 매’는 그래서인지 영웅 또한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기적으로 살아야 해, 다한 경. 평생 남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피에로도 울고 싶을 때가 있거든? 그럼 누군가 그 기분을 풀어 주고 웃게도 해 줘야 하잖아. 그런데 아무도 없어. 남을 위로하기만 하는 자는 위로받을 데가 없단 말야. (...) 다한 경, 날 먹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마. 손가락 같은 걸 잘라서 몸에 박지도 말고. 박은 거 다 빼 버려...”
- 홍정훈, '비상하는 매'
의분 하나로 일어났는데 폐기당할 팔자라면, 설령 그가 악당이 될지라도 이기적으로 살라는 게 그 영웅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악당 또한 기존의 세상에 짓눌려 있는 무언가를 대변하는 위인이고, 영웅과 악당을 구분하는 건 결국 세상의 패러다임뿐이니까. 그리고 그 패러다임의 무게는 점점 한 영웅이 감당하기에 디테일하고 무거워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본디 빛에서 어둠이 잉태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당이라는 건 세상과 우리에겐 너무나 추하고 혐오스럽기에, 결국 우리네가 도출하는 영웅은 한 번의 게임에서 어떠한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용도폐기하는 주인공일 것이다. 굳이 이런저런 말들로 서로의 얼굴 붉힐 거 없이 영웅 스스로 자신의 지분을 포기하고 무대에서 퇴장한다고 하니, 얼마나 깔끔한가.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놓고 다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희구한다.
최근 방영한 넷플릭스 정치드라마 ‘돌풍’이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부패한 운동권 등 권력을 위해선 야합도 서슴지 않는 대한민국 정치판을 싸그리 싸잡아 세련되게 싸다구를 날린 웰메이드 정치스릴러인 이 작품은 결국 주인공 박동호가 자신까지 불사르며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왜 쿠데타에 항거했지? 그들도 가난한 조국을 발전시키겠다는 명분이 있었어. 같은 갑옷을 입고 있어. 들고 있는 방패만 다를 뿐.” 처음과는 많이 변해버린 운동권 출신 정수진을 향한 박동호의 일갈은 결국 영웅이 변질될 때를 포착하지 못했을 때의 폐해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저 정수진을 향해선 이맛살만 찌푸리고 박동호는 스스로 자진하게 하는 세상의 시선이 너무나 희극적이라 유감스러울 뿐.
'장갑악귀 무라마사'라는 일본의 비주얼 노벨이 있다. 대체 역사를 배경으로 ‘검주’라는 건담 같은 로봇 타고 칼부림을 벌이는 SF 사무라이활극이라 할 수 있는데, 이야기 전반에 걸쳐 굉장히 음울하고 잔혹한 면모를 보인다. 악당들도 악당들이지만, 정의를 표방하는 선인들의 행보 또한 경악하게 만드는 전개가 그냥 기본이다.
특히 ‘마사무네’라는 검주가 꽤나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준다. 오래전 몽고군의 잔혹한 약탈을 목격한 도공이 ‘악을 징벌하여 정의를 실현한다’라는 일념으로 스스로를 말 그대로 갈아 넣어 만든 검주인데, 그 완성도가 너무나 빼어나 귀하게 다뤄졌다는 천하제일의 갑주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이 정의에 대한 의지가 너무나 과격하여 정신 나간 광기로 뻗어나갔다는 것.
“나는 정의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이 세상 어떤 것도 나 자신으로 만든 무기보다 완벽할 수 없다”라는 딱히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로직은 탑승자에게 상당히 잔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비기를 쓰고자 사용자의 팔을 찢어 그 살과 뼈로 탄환을 만든다든지, 사용자의 늑골을 뽑아 적을 사로잡을 갈퀴를 만든다든지, 사용자는 완전무결한 정의의 현현이니 그 사지를 뜯어 무기로 쓴다는, 정의가 미쳐버렸을 때를 생생히 보여준다.
악의적이라고 해야 할지, 적나라하게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사실 마사무네의 이러한 일면은 본디 세상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려왔던 영웅의 면모와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리고 세상이 영웅을 모질게 대한다곤 하지만 자신이 옳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영웅의 행보가 마냥 동화 속 왕자님처럼 찬란하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RPG게임 ‘디아블로1’에서 주인공 영웅은 악마 ‘디아블로’를 영원히 봉인하고자 자신의 머리에 악마가 봉인된 소울스톤을 박아 넣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디아블로를 한번 밟아봤으니 언제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밟겠다는 의지였을지는 모르겠다만, 유감스럽게도 영웅은 얼마 못 가 디아블로에게 되려 제압당해 하수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디아블로 2’의 시작이다.
이름을 적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데스노트’를 소유한 야가미 라이토는 전 세계에 범죄자를 대거 단죄하며 한 시대의 평화를 만들어냈지만, 이 과업을 이룰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는 오만 아래,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명탐정 L과 수사관 등을 악이 아님에도 모두 죽여버린다. 만화의 끝에서, 그는 지금까지 범죄자를 냉혹하게 단죄할 때의 모습과는 달리, 오만과 선민의식으로 뒤범벅된 추한 민낯을 보이며 몸부림치다 생을 마감했다.
로버트 게이브리얼 무가베는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였다. 그는 해방 이후 초유의 독재자가 되어 조국을 망국으로 이끄는 데 헌신했는데, 한때 수많은 학위를 따며 고도의 지성을 갖췄던 독립운동의 국부이자, 주목할 만한 세계 지도자로 회자되던 그 당시엔 이렇게 최악의 독재자가 될 거라곤 상상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무가베가 일으킨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전성기(?)에는 2억%를 뛰어넘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달성하며 경제학 교과서에서 초인플레이션의 사례로 언급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경제를 파탄 내어 국민 대부분을 극빈층으로 전락시키고, 잔혹한 독재정치로 나라 전반을 황폐하게 만들었음에도 그 자신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만약 야가미 라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리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악인의 서사’라는 문학평론집이 있다. 앞서 말했듯, 악을 보는 건 너무나 재미가 있어 점점 악에 대한 찬미가 문학 등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이 ‘악인의 서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평론가 9명의 대답이다. 하긴 문학에서 악을 단순화하라는 건 앙꼬를 빼고 찐빵을 만들라는 말과 같으니, 문학계에서 반발할 만도 하다.
평론을 읽는 건, 작은 이쑤시개를 하나 만들기 위해 굵디굵은 통나무 하나를 깎아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의 가치를 좌표에 정확히 특정한다는 목적성은 유익하지만, 알맹이에 비해 과도하게 현학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보노라면 피로감이 앞선다. 가성비 똥망인 것들이다. 그래도 이 경우는 ‘악당’이라는 소재가 너무나 먹음직스러워, 먹기 힘들어도 꾸역꾸역 입에 넣게 된다.
▲웹소설은 애초에 쾌감만을 위해 소비되는 ‘반서사적’ 장르이며, 악당은 사회 주류의 쾌감을 위해 일회용품으로 쓰고 버려진다(이융희), ▲모녀관계라는 애증적 관계는 어머니라는 악에 서사가 있어야만 한다(최리외), ▲이야기 속 악인은 매료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악을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박혜진) 등 다양한 장르와 그에 걸맞은 독특한 담론들은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특히 주목했던 건 ▲16~17세기 악당의 대명사였던 마녀의 서사가 사실 제도권 속 남성 작가들의 입맛대로 각색되었다는 전자영의 발언, ▲악이 사라진 자리엔 선이 새로운 악으로 자리 잡는다는 전승언의 발언이었는데, 여기선 전승민의 발언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녀는 악이 납작해져 버린 판에서의 선이라는 나르시시스트는 그 빈자리에 스스로의 오만과 선민의식으로 채워 넣으며 변질, 아니 본색을 드러낸다고 봤다.
전승민은 퀴어문학의 텍스트를 주로 살폈는데, 폭력적인 이성애에 대한 대안으로써 레즈비어니즘을 찾는 건, 어디까지나 도피적인 자위일 뿐이며, 애초에 동성애 자체도 이성애자 여성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왜곡된 이상향에 취한 주인공의 독선은 ‘사랑과 연민’이라는 제멋대로의 선한 행위로 되려 소수집단인 동성애 여성들의 고유한 삶의 정체성을 파괴함을 지적했다.
선을 표방하는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대상화하고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겉으로 선한 ’ 빛‘의 얼굴은 세계의 실체를 덮어버린다. 스스로가 어둠인 줄 모르는 빛, 제 행동이 악인 줄 조금도 인지할 수 없는 선의 무지각력은 악을 온전히 완성해 낸다. 겉으로는 연민과 사랑이라는 기표를 드러내지만 결국 대상을 동정하는 주체의 우월한 시선을 강화하는 ’ 빛‘은 악의 의도적 소거와 맞물려 있는 또 다른 ‘악’이다.
- 전승민, ‘조명등, 달, 물고기: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모든 영웅들은 ‘나 밖에 없다’라는 사명감 아래, 세상의 입맛에 맞으려 몸부림치는 단역배우들이지만, 동시에 ‘나 밖에 없다’라는 오만 아래,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들이다. ‘세상과 인간을 구한다’라는 영웅들의 명제에는 ‘(내가) 세상과 인간을 구한다’라는 폭탄이 숨겨져 있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영웅들의 자의식은 천천히 그 폭탄의 시간을 당겨온다.
난 운이 좋았다. 군 복무 시, 그간 공공연했던 구타와 폭력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건 제도적 정비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론 자신들의 선에서 이걸 끊겠다는 선임들의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규율이나 제재 같은 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게 군대이니. 막 자대에 왔을 때의 병장들을 보노라면, 선임들이 참 많이들 고생했겠다 싶다.
세상의 변화는 모두가 마음을 먹었을 때 이루어진다. 느리지만, 물과 같이 고요하면서 묵직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는 불나방이 춤을 추듯 여전히 우리는 영웅을 갈구하며 좇고 죽일 것이다. 내가 변화하는 것보단 남이 떠먹여 주는 변화가 편하고, 어그러졌을 때 모든 걸 떠넘기기도 편하니까. 영웅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만, 우리네의 이야기는 그저 논픽션 다큐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러니 영웅은 무한하게 호명된다.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 게임 등 여러 콘텐츠 속에서의 영웅을 보았다. 영웅을 밀어내는 세상이 매몰차 보이지만, 한편으론 그런 질시가 없을 때의 정신 나간 영웅을 보는 것도 영 입맛이 쓰다. 악의 서사를 축소하고 선의 서사를 넓힌다는 발상은 되려 악에 대한, 그리고 근본적으로 선에 대한 이해마저도 편협케 한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영웅을 호명하고 쓰임이 다하면 영웅 스스로 자살하며 무대에서 떠나 주기를 바란다.
그러하니 모든 영웅은 죽여야만 한다. 우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하나의 영웅에게만 모든 걸 전가하는 변화 따위보다야 우리 모두가 변화를 이끌어 가는 세상을 위해. 애초에 영웅이 없어 추락하는 세상이라면, 아직 그 정도로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런 이름 없는 영웅들의 세상을 꿈꾼다.
그게 안되니까 죄다 영웅, 영웅. 노래를 불러대는 거겠지만.
- 참고서적 -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2017, 시가 아키라 저)
굿 미 배드 미(2017, 알리 랜드 저)
페이트 제로(2014, 우로부치 겐 저)
비상하는 매(1999, 홍정훈 저)
장갑악귀 무라마사(2009, 나라하라 잇테츠)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2018, 한민 저)
역사란 무엇인가(2007, 에드워드 카 저)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조현설 저)
민담의 심층(2018, 가와이 하야오 저)
신이 된 인간들(2018, 박정원 저)
엽기 세계사(2007, 이성주 저)
악인의 서사(2023, 전승진, 박혜진 등 9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