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의 중요함.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들춰내 고발하거나 당대 사회의 가치들에 대한 사상적 진단을 내리기보다는, 너무 평범하고 익숙해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그러나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루는 것들을 찾아서 기술하는 데 주력했다. 페렉은 당대 거대 담론들에 눌려 있던 미시적인 삶의 요소들을 끌어내 우리의 지각과 의식의 영역 안에 되돌려 놓으려 했고, 각종 사건과 스펙터클의 범람 속에 묻혀버리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붙들어 기록해두려 했다."(p.192)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모두 일종의 일상적 실명 상태에 빠져 있다. (중략) 페렉에 의하면, 일상적 실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되는 것이다. (중략) 시시하고 쓸데없는 질문들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p.193)
우리는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하나씩 소소한 일상의 것들을 억누르며 현실의 문제에 집중한다. 애써 무시하거나 참고 참다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차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외면했던 소소한 일상의 가치와 행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랭 거리>에 대한 역자 노트를 읽은 뒤 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는 "그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나에게는 프랑스 어딘가에 있는 거리일 뿐인데 이렇게 자세히 알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며 지루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1969년 시작된 글이 1970년을 지나 1975년까지 흘러갈수록 지루함은 사라지고 내가 몇 년 동안 빌랭 거리에서 거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이 끝날 때는 고향을 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글을 읽을 때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음에도 마지막에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의 글 솜씨에 감탄하며 빠져들었다.
이후 천천히 <보부르 주변 여행>, <런던 산책>, <지성소>를 읽으며 <빌랭 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러다 며칠 뒤 카페에서 <천구백칠십사 년 한 해 동안 내가 먹어치운 유동식과 고형 음식들의 목록 작성 시도>을 읽으며 웃음이 터졌다. 정말로 본인이 1974년 한 해 동안 먹어치운 음식을 나열한 것이다. 심지어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종류의 음식끼리 모아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부분을 통해 일상의 소소함을 집요하게 분류하고 기록한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렇게 웃으며 이 책의 마지막 <나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에 도달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지금 이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떠올려보자!"라며 빠르게 노트에 작성했다.
"나는 좋아한다."
덤덤함, 차분함, 느긋함, 조용함, 부드러움, 선량함, 여유로움, 기품 있는, 우아함, 따뜻함, 친절함, 가을, 겨울, 펭귄, 보더콜리, 흰머리오목눈이, 부엉이, 올빼미, 성모 마리아, 아테나, 아르테미스, 데메테르, 푸른색 수국,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위치한 의자, 종소리 들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 목로주점, 제르베즈,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산시로, 그 후, 문, 행인,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교토, 만엽, 말차, 기요미즈데라, 교토 네기야 헤이키치, 텐동, 야끼소바, 오꼬노미야끼, 돈지루, 미소된장국, 일본 가정식, 커피, 산미, 플로럴향, 베리향,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에스프레소, 카페, 만년필, 미도리MD, 펠리칸, M200, M400, 세일러, 프로기어 슬림 14k m닙, 프로기어 21k B닙, 파이롯트, 커스텀 743 SFM닙, 캡리스 데시모 F닙, 짙은 푸른색의 겨울 동해, 네이비블루, 블루 블랙, 라피스라줄리, 옥색, 다크 그린, 톤 다운된 베이지, 톤 다운된 브라운, 다크 브라운, 버건디, 톤 다운된 딥틸, 블랙, 가죽, 고대 문명, 고대 로마, 이탈리아, 볼로냐, 알리오 올리오, 리소토, 나폴리 피자, 젤라토, 바질, 바질 페스토, 올리브, 올리브오일, 카프레제 샐러드, 발사믹 드레싱,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오리고기, 양고기, 초밥, 회, 광어, 임연수어, 굴비, 생태, 동태, 명태, 황태, 북어, 코다리, 대구, 갈치, 가자미, 도미, 서울, 한강, 마곡, 목동, 망원, 연남, 서촌, 부암동, 광화문, 경복궁, 창덕궁, 보문동.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더위, 여름, 대중, 광기, 무례함, 뻔뻔함, 욕설, 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 터질 것 같은 백팩, 대중교통 내부에서 뒤로 맨 백팩.
생각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고 난 역시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무던한 사람이지.
책을 읽으며 내 눈앞에 있는 사물들을 시작으로 너무 평범하고 익숙해서 잊고 있던 존재들에 대해 집중했다. 그러자 조급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현재의 나와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 들었다.
현재 삶이 힘들거나, 초조함으로 고통스러운 분들에 페렉의 글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