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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n 09. 2023

평온한 삶 - 마르그리트 뒤라스

권태와 평온한 삶의 관계에 대하여.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새로운 톨킨의 책 등을 통해 좋아하게 된 출판사 중 하나인 아르테에서 새로운 세계문학 시리즈를 론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 있게 살펴봤다.


“음.. 프랑수아즈 사강? 그 뭐야. 그.. 아. 예전에 읽었는데 아! 브람스.. 그.. 아무튼 내 스타일은 아니었음. 패스. 버지니아 울프. 관심 없음. 읽을 책이 많으니 일단 패스. 에밀리 브론테. 워더링 하이츠? 오!!! 폭풍의 언덕!! 이거야!”라며 며칠 뒤에 서점에 방문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평온한 삶’은 관심조차 없었다.


책이 잘 읽히지 않던 시기에 만난 워더링 하이츠는 너무 두꺼웠고 완독할 자신이 없어지며 겁이 났다. “아.. 집에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도 있고 돈키호테도 있고 아.. 그것들부터 완독해야지..” 갑작스럽게 마음에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꺼져버렸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찰나 불현듯 떠오른 평온한 삶.


“그래도 언젠가 권태롭지 않은 날이 오겠지. 머지않았다. 나는 그럴 필요조차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평온한 삶이 오고 있다.”


권태. 지금의 내 상태.


관심조차 없던 뒤라스의 책을 결제하고 카페로 향했다.




# 01.

제롬은 집안을 파멸시킨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화자인 프랑신의 외삼촌이다. 이 자는 프랑신 동생의 아내와 외도를 하였고 한때 벨기에 R의 시장을 했던 프랑신의 아버지를 주식에 끌어들여 파멸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그는 프랑신의 동생 니콜라와 싸움 끝에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죽음이 통쾌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롬같은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경우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끝나가거나 힘든 상황을 맞닥뜨리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비참하고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며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고통에 소리만 지를 뿐이다. 그러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줄 의사를 부르겠다는 말을 하면 잠시 조용해진다. 죽는 순간까지 이기적이고 추접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면 마음 깊숙한 곳에 제롬같은 망나니 또는 사기꾼 같은 면모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선하기만 하면 천사 또는 신일 것이고 무조건 악하기만 하면 악마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 프랑신의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다. R의 시장으로 평온한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제롬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과 가족들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어떤 환경에서 살고 어떤 사람과 살아가는지도 중요하다.



# 02.

제롬으로 인해 파멸하지만 그를 탓하기보다는 밀어닥친 불행을 받아들이고 이를 회복하려는 프랑신 부모의 모습을 보며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닥쳐온 불행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화를 내며 후회하는 것보다 밀어닥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 03.

“어쨌든 아빠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롬의 죽음을 두고 회한의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었다. (중략) 제롬이 죽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제롬의 죽음을 무관심하게 지켜봐 놓고 이제 와서 성수로 축복하는 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아빠 엄마는 예순 살을 넘긴 지금 거짓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일을 하고 나면 더는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할게 뻔했다. 아빠와 엄마는 그것을 알았다.”(p.36)



# 04.

“우리는 절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고 나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법조차 잊었고, 행복을 꿈꾸지만 진짜 행복이 닥치면 짓눌려 버릴 몽상가, 방탕한 인간이었다. 제롬이 죽고 나니 클레망스가 남았다. 클레망스가 떠나고 나니 노엘이 남았다. 그리고 우리의 가난이 남았다. 스물네 해 묵은 우리의 무기력이 남았다.”(p.41)



# 05.

프랑신의 엄마는 항상 부유했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의 삶이 힘들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프랑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엄마는 마음속으로 자식들을 버린 지 오래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엄마에게 분노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쓰러웠다. 분명히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아니지만 오래전 행복했던 추억이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힘이 쇠퇴해가는 노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그들에게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것이 평온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 06.

니콜라는 클레망스엑게도 뤼스에게도 버림을 받는다. 그가 계속 버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읽다보면 프랑신이 니콜라와 함께 있는 뤼스의 표정을 보며 말한다. 그녀가 니콜라의 일방적이고 부담스러운 관심과 애정에 지쳤다고 말이다. 프랑신의 말을 들으며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애정표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지나친 애정표현과 관심은 상대방을 지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니콜라와 노엘을 두고 외도를 한 클레망스나 티엔과 잘 해보기 위해 니콜라를 이용하는 뤼스 또한 올바른 인간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07.

프랑신은 해변에서 홀로 지내며 처음으로 자신을 살펴본다. 고향에서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살던 삶이 그녀에게는 독이었다. 뷔그에서의 삶은 온전한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해변에서 홀로 느긋하게 지내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들여다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평소 생각하지 않던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을 조금씩 잊어간다.


그녀의 모습을 통해 때로는 여유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이러한 환경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평생 동안 뷔그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 08.

“파도 너머는 고요하다. 그곳의 바다는 아마도 자신이 멈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중략) 이제는 호흡하는 폐를 가진, 살아있는 짐승뿐이다. 생각도 할 수 있는 그것은 서서히 습기에 젖고, 불투명한 것을 흡수하고, 그 불투명한 것이 계속 젖고, 더 고요해지고, 더 춤추는 것 같다.

하지만 곧 갑자기, 상념이다. 상념이 돌아오고, 두려움으로 헐떡이고, 거대해진(바다가 달라붙을 만큼 거대해진다.) 머리에 부딪힌다.”(p.124)


때로는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고 긴장이 풀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서히 머릿속으로 상념이 밀려오며 결국 불안과 두려움으로 다시 가벼운 두통과 피곤이 밀려온다. 과연 계속 고요하고 평온한 자세로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결국 상념과 두려움,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 09.

투덜거리며 T에 방문하는 그에게 프랑신은 왜 왔냐는 질문을 한다. 그때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익숙해서 그런 거죠.”


사람은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기분, 상태와 상관없이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요즘 나의 상황. 직장에 대한 상태와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익숙함 때문에 잘못된 아닌 것을 알면서도 같은 생활을 유지하면 그 끝은 더 힘든 삶이 시다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지속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 10.

홀로 해안가에 있는 프랑신은 권태에 휩싸인다. 홀로 지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 혼자 있고 싶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가끔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은 어떤 것이든 활동이 필요하다. 집중할 수 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어떠한 ‘무언가’가 말이다.



# 11.

프랑신은 T에 방문하며 새로운 삶을 꿈꿨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권태, 우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며칠 동안 새로운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권태, 우울, 불안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저주일 수도 축복일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저주일 수도 축복일 수도 있다.




[권태(명사)] :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


삶을 살면서 권태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권태를 모르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한때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것에 지루함을 느끼며 관심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고통으로 바뀌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로봇이 아닌 이상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다만 권태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권태를 받아들여 괴로워하는 동시에 새로운 행복과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권태에 빠져들어 앞으로는 새로운 행복과 사랑은 없을 것이라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목숨을 끊기도 한다.


권태는 사라졌다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그렇기에 권태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다. 단번에 잊어야 하는 감정이 아닌, 내 안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존재로 인식하고 권태를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괴롭겠지만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고 부당한 것들에 투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행복, 사랑, 편안함, 감사함을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고 진정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스러워도 전진해야 한다.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것을 위해 속도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평가와 시선을 무시하며 고통스러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여정이 인간의 평온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읽기 어려웠지만 권태와 평온한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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