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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Aug 28. 2023

악티움 해전 - 배리 스트라우스

고대 로마의 방향을 정해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의 서평을 읽던 중 어느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이었다. 오랜만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을 만나 들뜬 마음으로 책을 검색하던 중 해당 책을 출간한 '책과 함께' 라는 출판사를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출간한 책들을 살펴보던 중 어떤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악티움 해전? 고대 로마? 옥타비아누스. 클레오파트라.. 아그리파. 이거야!"

혼자 중얼거리다가 원래 구매하려고 했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은 잊어버린 채 악티움 해전을 결제하였다.




# 01.

"악티움 해전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두고 동서의 양대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거대한 싸움이었다. 세계의 무게 중심을 서방에 둘지, 아니면 동방에 둘지를 결정한 중대한 전투였다."(p.10)

지금까지 악티움 해전은 단순히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된 전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함께 한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의 주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유능한 정치인이자 외교관 그리고 리더였다.

저자는 만약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승리했다면 로마 제국은 서양이 아닌 동양적인 모습이 강조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브리튼 왕국, 게르만족과의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많은 흥미를 느꼈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23.08.07)

# 02.

악티움 해전은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이미 양측이 육상, 해상에서 6개월에 걸쳐 교전을 해왔다. 또한 외교, 프로파간다와 가짜 뉴스를 포함한 정보전, 경제적, 인간적 정서까지 개입된 전쟁이었다. 악티움 해전은 결코 소규모의 해전이 아니었다.(23.08.07)

# 03.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이성적, 서양, 남성을 강조하며 적을 비이성적, 동양, 사악한 여성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현대에서 인종차별주의, 서양 우월주의, 여성 혐오주의로 해석되기도 한다. 반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을 기존의 훌륭한 체제를 지키는 수호자라 주장했다.(23.08.07)

# 04.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무참히 살해당한 카이사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황제가 되려고 했으며 카이사르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그와 대립하던 공화정과 뜻을 같이 하며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청했다. 아마도 클레오파트라는 독립적인 이집트 왕조를 지키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23.08.07)

# 05.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안토니우스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존재하는 자료도 그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내용이다. 역사는 승자를 중심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에 대한 기록도 그러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카이사르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의 능력이 부족했다. 이 책에서도 내가 알고 있던 그의 기행과 큰 실패들이 언급된다. 물론 그가 완전히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가 죽기 전까지 그의 측근으로 활약했고 그의 지시를 문제없이 잘 해결했다.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판을 짜고 설계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길었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어수선한 로마를 통합할 능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반대로 후에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 항상 인류 역사상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될 정도로 정치 분야의 천재로 불린다. 결국 시대가 정복자 스타일의 리더보다는 건축가 스타일의 리더인 옥타비아누스를 원한 것이다. (23.08.07)

# 06.

안토니우스가 기행을 벌여도 카이사르는 여전히 그를 신뢰했던 것 같다. 안토니우스 또한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하며 많은 일을 해결했다. 하지만 '3월의 이데스 날' 카이사르가 무참히 살해당한 이후 그가 미리 작성한 유언장에는 자신이 아닌 열아홉 살의 애송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대부분의 재산과 권력을 넘겨주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마도 이때 안토니우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 예상했다.(23.08.07)

# 07.

내가 몰랐던 안토니우스 조상들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고 후에 그가 잔혹하게 살해한 키케로와 과거에 어떤 악연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역시. 인간에 대한 증오와 악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23.08.07)

# 08.

"카이사르는 합법적 적자를 두지 않았다. (중략)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그 아이는 서출이었다. (중략) 일반 대중들이 볼 때 그녀가 이집트 여왕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이 아닌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정한 것이다." (p.34)

"야심만만 한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똑똑하고 매력적이었고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골라가며 했다. (중략) 키가 작고 다소 허약한 체격이어서 겉모습은 그리 당당해 보이지 않았으나 강인한 성품으로 보충했다." (p.34)

"아그리파의 경우,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를 찾아가 아그리파의 형을 감옥에서 풀어달라고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그 형이 카이사르에게 대적해 싸웠는데도 사면을 받아준 것이다. 그런 결정에 아그리파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한 평생 옥타비아누스에게 봉사했다." (p.35)

옥타비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장점을 잘 이용했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같은 정복자의 재능이 아닌 건립자 또는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갖췄던 것이다.(23.08.07)

# 09.

"청년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정치적 기질을 함양하는데 여러 스승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스승은 역사적으로 기만에 능하기로 이름 높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의 발치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치학 교수에게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듣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p.35)

본인의 능력과 기질도 중요하지만 그 능력을 훌륭하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옥타비아누스는 선택받은 자였을까? 자신의 능력을 키워줄 최고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하며 자신의 능력을 착실히 키워나갔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운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23.08.07)

# 10.

필리피 전투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유리한 전투였지만 상황을 오판한 카시우스의 자살과 군사적인 능력이 미흡한 브루투스로 인해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안토니우스는 풍요로운 동방에 대한 권한과 갈리아 일부 지역의 권한까지 가져갔다. 반면 전투 중에 패배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의 권한을 나눠가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방은 인적, 경제적 자원이 풍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던 반면, 서방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보다 보상을 적게 받은 것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갖지 못한 우수한 인력인 로마인들을 얻었고 로마의 의사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23.08.11)

# 11.

옛날 권력자들은 자신을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음주와 연회를 담당하는 디오니소스의 건전하지 못한 이미지와 달리 고대에는 '해방' 과 '정복'의 신이기도 했다.

안토니우스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디오니소스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23.08.11)

# 12.

"다문화적이고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고 그 장엄한 측면에서(비록 인구수는 적을지라도) 촌스러운 로마를 완전히 압도했다. (중략) 그러나 로마의 군사력과 외교력은 이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p.57)

고대 이집트는 오래된 문명이었고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촌스럽지만 강인하고 현실적인 로마가 있었다. 결국 이집트는 군사력과 외교력이 절정에 도달한 로마를 뛰어넘지 못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경제, 문화, 과학의 발전만으로는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력과 외교력이라고 생각한다.(23.08.13)

# 13.

로마는 이집트를 독립국으로 남겨뒀지만 실상은 본인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돈을 찾을 수 있는 거대한 은행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이집트에 대한 독점적인 지휘권 경제권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정 가문에서 이집트에 대한 독점권을 얻는 순간 독재자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멸망 직전의 로마는 향락과 사치에 빠져 근면함, 성실함 그리고 현실적인 생각과 행동을 상실했고 현재 우리는 대부분 이 시기 로마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전부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국 초기의 로마인들은 주변 국가들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근면, 성실하였고 현실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이집트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거의 수탈 수준의 세금을 걷으면서도 그들에게 독립국 지휘를 부여하여 골치 아픈 문제들은 최대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두었다.

진정한 독립국이 되기를 원하는 이집트의 통치자들 입장에서는 로마가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패권을 잡은 로마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었다.(23.08.13)

# 14.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이집트와 로마를 통 들어 굉장히 유능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용감했고 매력이 넘쳤으며 누구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뛰어난 카이사르 또한 그녀의 능력과 필요성 그리고 매력에 빠져 아들까지 둔다.

그러면서도 때로 그녀는 잔악했고 독선적이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왕의 기질을 가진 여성이었고 독립성을 잃고 로마의 완전한 속국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거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모습과 평판은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외모와 관련된 부분은 더욱 그렇다.(23.08.13)

# 15.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깎아내렸다. 그녀는 악티움 해전의 승리자들에게는 '악' 그 자체였다. 성적인 매력으로 로마의 유능한 장군을 타락시킨 요녀, 로마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악녀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뛰어나고 매력적인 인물로 기억했다.

그녀는 일곱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고 그녀의 지원으로 과학, 문화 부분에 큰 성과를 이뤄냈다. 그뿐만 아니라 의학, 약학에도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행정, 정치, 문화, 과학 등 국가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녀를 희대의 악녀, 요부로 깎아내렸지만 이집트인들은 그녀를 유능하고 위대한 여왕으로 생각하고 따랐다.

역사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작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과거의 인물을 판단하려면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야 된다.(23.08.13)

# 16.

동방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안토니우스와 다르게 옥타비아누스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우선 제대 군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기존 민간인들의 땅을 몰수했어야 하는데, 그런 이들 중에는 안토니우스의 전사도 상당수 포함 되어있었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정예화된 병사로 구성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다.

이 과정에서 안토니우스가 그들을 부추겨 옥타비아누스를 괴롭히라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의심이 많은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의심했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하다.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성격과 다르게 적의 지도자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동자인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는 로마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로 끝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안토니우스와 사이가 틀어질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 의한 결정인듯싶다. 페루시아 전투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거대한 위협이 부상했다. 바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이 점점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페루시아 전쟁을 살펴보면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이유가 드러난다. 안토니우스의 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얼마나 분노하였을까? 하지만 그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감정적인 정복자 유형의 리더가 아닌 이성적이고 차분한 건축가와 같은 리더였다.

* '페루시아'는 현재의 페루자이다.

* 내가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MBTI는 INTJ로 알고 있다.

(23.08.14)

# 17.

고대에는 결혼도 세력을 지키거나 확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또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큰 다툼을 방지하기 위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23.08.14)

# 18.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의 사례를 봐도 권력을 가진 가문의 여성들은 정략결혼을 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녀들은 새로운 남편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고 때로는 친정에도 큰 이득을 주려고 노력했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가문 사람과 결혼하여 온갖 정보를 친정에 전달했다.

많은 자료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가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유력 가문의 여성들은 변변치 못한 남편을 대신해서 서슴없이 정치, 외교적인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23.08.14)

# 19.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결혼식 상황을 상상하는 부분에서 결혼계약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계약서에는 지참금의 규모, 이혼할 경우 그 지참금의 처리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23.08.14)

# 20.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일시적으로 화해를 한 시기에도 폼페이우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폼페이우스와 관계를 개선하며 로마의 불안을 잠재웠다. 더 나아가 폼페이우스가 삼두에게 권력을 공유하자는 합의안을 제시했지만 그들은 난처해하며 답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합의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는 폼페이우스의 처제였던 스크리보니아와 이혼을 한 뒤 그가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여성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을 한다. 이후 그는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위대한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군사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그리파에게 군의 지휘권을 넘겨준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고대 로마시대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매일 같이 반란, 배신, 내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말이다.(23.08.14)

# 21.

기원전 39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때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디오니소스와 아테나라고 부르며 아첨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아첨을 물리치면서 "디오니소스와 아테나가 결혼을 했으니 지참금 조로 돈을 내라"라며 상당한 세금을 물렸다고 한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어이없어할 그리스인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23.08.14)

# 22.

[타렌툼 조약]

기원전 38년 경.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만나야만 했다.

이 시기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전쟁 중이었으나 진척이 느렸고 더 많은 전함과 금전이 필요했다. 안토니우스 또한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면 더 많은 로마 군단병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삼두정치의 만료가 이 시기. 기원전 38년에 예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둘은 서로를 믿지 못해 타렌튬 교외의 타라스 강(오늘날의 타라강)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만나기까지 두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옥타비아였다.

그녀는 둘의 사이를 오가며 적극적으로 중재하였고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만나 의미 있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1)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군단병 3만과 정예병 1,000명을 제공하기로 한다.

2)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배 120척과 전함 10척을 추가로 제공하기로 한다.

3) 마지막으로 삼두정치를 5년간 갱신한다.

4)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에게 얻은 딸 율리아와 안토니우스가 풀비아에게서 얻은 맏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한다.(그런데 문제는 결혼을 할 소년은 여섯 살이었고 신붓감은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았다.)

타렌튬 조약에서 옥타비아의 영향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옥타비아가 둘 사이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녀가 정직한 중개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동생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도록 노력했으니 말이다.

특히 거래 내용 중 첫 번째. 안토니우스에게 2만의 군단병과 1,000명의 정예병을 지원한다.는 거래에 대해 내가 알고 있기로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으로 인하여 난처했을 때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궁금하다.(23.08.14)

# 23.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승리한다. 그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많은 실패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도 한다. 심지어 거물 정치인, 지도자로서 부하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시종 한명과 도망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로마의 권력자였다면 더 이상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먹지 않도록 폼페이우스와 협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략이 실패할 때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그를 괴롭혔다. 그가 쓰러질 때까지 말이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강인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중략) 엄청난 정치적 내능, 원칙을 무시하는 대담성, 천변만화하는 교활함 같은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인물은 타협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p.104~105) (23.08.16)

# 24.

폼페이우스를 박살낸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지중해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거기에다 카이사르도 이루지 못한 강력한 해군을 창설했다. 물론 그의 훌륭한 장군 아그리파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장점을 활용하여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시켰다.(23.08.17)

# 25.

폼페이우스를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은 끝났다고 선언하면서도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일리리아 지방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능한 장군, 종복자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에게 배정했던 합의를 위반한 것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안토니우스도 합의를 위반하고 히스파니아에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두 명 모두 합의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23.08.17)

# 26.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물어 뜯었다. 내용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더 대중에게 공감을 받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기록은 승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기록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안토니우스의 주장을 확인하고 찾아보는 것은 힘들다.(23.08.17)

# 27.

"파르티아 제국은 오늘 날의 튀르키에 동부에서 이란 동부까지 뻗은 거대 제국으로 그 거리가 2,000킬로미터가 넘었다."(p.115) "로마와 파르티아는 오늘 날의 이란 북서북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기다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며 경계했다."(p.115) (23.08.17)

# 28.

폼페이우스에게 고전하던 옥타비아누스는 포기를 모르는 도전으로 결국 승리한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군에게 패배한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는 많은 병사를 잃게 된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부족한 군단병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타렌툼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했던 약조가 떠올랐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군단병을 제공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약조를 어기고 단 한 명도 보내지 않는다면 안토니우스와 전면전을 하자는 말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군단병을 보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처음 그와 약조한 수의 10분의 1만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을 이끌고 그와 만나기 위해 아테나에 간 인물이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이자 그의 아내인 옥타비아였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만나기로한 아테네에 안토니우스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실지로 그는 아테나에 오지 않았고 옥타비아에게 편지를 보내 로마로 돌아가라고 했다.

옥타비아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옥타비아누스는 누이에게 그와 이혼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녀는 동생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는 남매가 안토니우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잘 꾸며진 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가 옥타비아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이혼 사유가 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23.08.20)

# 29.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서로 다른 비전을 대표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귀족과 헬레니즘 군주 그리고 동방을 중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중시했고 안토니우스와 비교하여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고 당방의 부와 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간다. 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의 세력이 강대해지는데 일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원과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으로 인해 세력이 막강해졌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승부수를 던진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자신이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세력을 더 넓히려는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보다 강한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23.08.20)

# 30.

"게다가 '도둑이 도둑을 알아본다.' 라는 원칙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변절자들을 잘 알아보았다.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그런 행위를 많이 했다는 뜻이다."(p.152)

본격적으로 안토니우스와 전쟁이 발발할 시기가 다가오자 서로의 진영을 배신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정보원과 프로파간다 자원으로 활용했다. 개인적으로 '도둑이 도둑을 알아본다.' 라는 부분을 읽고 웃음이 터졌다.

# 31.

안토니우스를 배신한 플란쿠스는 최고의 아첨꾼이자 배신자였다.

"플란쿠스는 클레오파트라와도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중략) 너무나 노골적인 아첨꾼인 그는 한 연회에서 여왕을 즐겁게 해주려고 인어로 분장하고서 알몸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온몸에 푸른색 물감을 칠하고, 머리에는 갈대를 꽂고, 엉덩이에는 생선꼬리를 달고서 두 무릎으로 연회장 바닥을 기었다고 한다." (p.153)

중요한 내용은 아닌데 웃겨서 기록을 남긴다. 예나 지금이나 아첨을 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놔야한다. 엉덩이에 생선꼬리를 달고 연회장 바닥을 기었다니. 나 같았으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23.08.20)

# 32.

옥타비아누스는 한 때 클레오파트라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던 플란쿠스를 통해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로마 베스타 신전에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의 유언장을 뺏어온다. 그런 뒤 연극을 하듯이 극적인 상황을 만들며 안토니우스를 비난한다.

유언장의 내용은 그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이 죽으면 클레오파트라 옆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점들을 부각하며 그와 클레오파트라를 비난한다.

이러한 내용과 유언장의 존재 자체를 옥타비아누스가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내용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무기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옥타비아누스를 무서워하는 자들이 많았다.(23.08.20)

# 33.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집중한 전쟁은 로마에 여러가지 이점을 안겨주었다.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언하지 않음으로서 새로운 내전은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셈이 되었다. 홍보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집트 여왕은 거의 완벽한 적이었다. 여자, 외국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군주인 여왕은 로마의 편견이 완벽하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텃밭이었다."(p.158~159)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특히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인정한 순간부터 옥타비아누스는 한적한 시골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돌아가야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23.08.20)

# 34.

군사적, 경제적 등 많은 부분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장 이탈리아 침공을 진행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가 이탈리아 침공을 망설였던 이유는 해상에서 아그리파와 해전을 벌어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병사수와 함대의 수는 훨씬 더 많았지만 해전에 대한 경험은 아그리파가 훨씬 우월했다. 결국 수는 적더라도 아그리파의 해군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항상 모든 것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내실을 다져 놓는 것이 중요하다.(23.08.21)

# 35.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탈리아 침공을 하지 않는다. 아그리파의 영향도 있겠지만 대군을 움직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제 51세인 안토니우스는 옛날과 다르게 신중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후에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지 않은 것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이유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이탈리아 침공은 안토니우스가 승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던 것이다.(23.08.21)

# 36.

오히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메토네 점령을 제안한다. 이는 선제 공격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참고로 메토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핵심 기지였다.

아그리파와 옥타비아누스는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할 때 적의 보급부터 끊었다. 이를 통해 적들이 후퇴를 하든 굶어 죽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의견을 지지했고 아그리파의 작전은 멋지게 성공한다. 메토네를 점령한 것이다.(23.08.21)

# 37.

고대 정보전에서 징조는 훌륭한 무기였다. 예를 들면 "안토니우스의 조각상에서 피가 흐르거나, 땀이 나왔다" "안토니우스가 제대 군인들을 위해 정착촌을 조성한 이탈리아 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등이다.

이런 징조에 대한 소문은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도 하였고 반대로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도 하였다. 때로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완전히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허무맹랑한 징조 또는 소문을 믿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이성적이고 진실에 대해 고민해봐야 된다.(23.08.24)

# 38.

병사 수는 옥타비아누스가 적었지만 안토니우스의 병사들보다 훨씬 충성스러웠고 단결이 잘 되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병력의 수는 많았지만 다양한 인종, 국가들의 연합이었고 병사들 같의 단결을 힘들게 했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은 전쟁 이전부터 마찰이 많았다.

무슨 일을 하든 내실을 다져야 된다. 그래야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23.08.24)

# 39.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위해 상륙이나 캠프를 설치할 때 안토니우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안토니우스가 바다의 통제권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주었다는 인상을 주었고 그의 리더십에 금이 생겼다.

그의 이런 행동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메토네의 경험과 해상전보다는 지상전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이러한 그의 선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불신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본인에게 불리한 조건이라도 필요하다면 빠르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했다.(23.08.24)

# 40.

지속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밀리던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명성과 실리를 찾을 기회를 얻는다. 악티움 북쪽 고지에 캠프를 차린 옥타비아누스의 식수원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그가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지금까지의 굴욕을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또다시 많은 작전을 실패한다. 특히 그의 동맹이었던 국가들이 배신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로 간 것이 가장 큰 손해였다. 이는 안토니우스의 리더십에 더욱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번 작전을 통해 그는 자신이 악티움에서 어떻게해야 승리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23.08.24)

# 41.

해상전에서 연패를 한 안토니우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기 시작했고 그의 동맹들은 하나둘씩 그를 떠나 옥타비아누스에게 갔다. 결국 지상전만을 원했던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특히 옥타비아누스가 신뢰한 장수 아그리파가 엄청난 승리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을 알아보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믿어준 결과였다.

리더가 꿈인 사람은 인재를 알아보고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23.08.25)

# 42.

계속되는 패배와 배신으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는 심증으로 일부 부하들을 고문하고 사형시켰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이었다.

그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좋은 장군이었지만 위대한 장군은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지휘를 충실히 이행하는 능력은 있었지만 단독으로 계획하고 진행한 전쟁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 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영웅은 될 수 없었다. 그가 부하들을 고문하고 사형시키는 순간부터 그의 패배는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다.(23.08.26)

# 43.

안토니우스는 거듭된 실패로 인해 악티움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회의를 진행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제대로 된 진행이 불가능하였다.

회의에서 다양한 도주 방법이 논의 되었지만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해상으로 도주하는 방법 뿐이었다.(23.08.26)

# 44.

안토니우스를 배신한 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넘겼다. 그의 작전, 분위기, 군의 규모 등. 가치가 있는 정보들을 말이다.

이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악티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는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작전회의를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무방비 상태로 도망치는 그들을 쫒아가 큰 피해를 입히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전쟁 경험이 풍부한 아그리파는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적다며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전투에 재능이 부족한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아그리파의 의견을 따른다. 그는 진정한 리더였다.(23.08.27)

# 45.

악티움 해전이 너무 오래 된 전쟁이라 세부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자료와 유물덕분에 전반적인 상황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준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부하들에게 탈출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동요를 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탈출을 할 때 운영할 수 없는 배들은 불 태워버렸다. 운영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면 적의 손에 떨어져 그들의 전력을 강화시켜주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단, 대형 선박들은 불 태우지 않았다. 잘못하면 부하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미 안토니우스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졌고 이를 최대한 잘 활용했다. 이번 전쟁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자만하지 않고 자신들이 패배하는 상황도 생각하며 전쟁을 대비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미 권력의 중심이 되기 전부터 정보를 얻으려 온갖 방법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현재 우리와 같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정보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많은 부를 쌓은 사람들이 정보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23.08.27)

# 46.

드디어 두 세력은 전투를 시작했다. 병사들의 건강과 사기는 옥타비아누스 측이 압도적으로 좋았지만 비교적 열세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병사들도 최선을 다했다. 그 때문인지 예상과 다르게 안토니우스 군이 옥타비아누스의 공세를 잘 버텨냈다. 하지만 어떠한 돌발적인 사태로 인하여 모든 상황이 변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움직인 것이다.(23.08.27)

# 47.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치열하게 싸우던 도중 해상에 빈 공간이 생겼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도망친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못한채 그녀를 바라봤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깜짝 놀란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당시 로마인들은 남녀 차별적인 완고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안토니우스의 행동이었다. 아무리 후퇴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상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부하들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간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를 비겁하고 타락하여 구제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의 행동은 사전에 계획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은 옥타비아누스와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지만 결국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입장에서는 각종 질병과 피로로인하여 지쳐버린 병력을 힘들이지 않고 처분할 수 있는 기회였다.(23.08.27)

# 48.

악티움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준비한다. 비참하게 죽은 카이사르를 통해서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배운 그는 사람들에게 큰 미움과 질투를 받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불필요한 권력 사용, 자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보다 더 치밀하고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23.08.28)

# 49.

악티움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는 우울증 증상을 보이며 시간을 보냈다. 전쟁에 패배한 이유도 그를 우울에 빠지도록 했지만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안토니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살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시간을 보냈고 이집트 내의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열중했다. 동시에 수에즈만에서 안토니우스와 함께 도주 할 수 있도록 함대를 건조했다. 현실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던 그녀는 본인들이 옥타비아누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고 도주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옛날부터 그녀와 적대 관계에 있던 나바테아 아랍족의 왕인 말쿠스가 그녀의 건조 중인 함대에 불을 질러 모두 파괴해버린다. 결국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벌여야할 운명이었다.(23.08.28)

# 50.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여러 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제안에 별 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권했다.(23.08.28)

# 51.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따는 소식을 듣고 안토니우스는 칼로 본인의 복부를 찌른다. 하지만 칼이 그리 깊게 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못한채 고통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이후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사망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고상한 로마인답게 최근에 일어난 불운을 슬퍼하지 마라 등의 말을 한 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3세 였다.(23.08.28)

# 52.

옥타비아누스를 만난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유혹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개선식에 그녀를 끌고 다니며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을 파악한 그녀는 다양한 자살 시도를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겠다는 등의 협박을 통해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23.08.28)

# 53.

하지만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0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그녀는 39세였다. 자살 방법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전갈 또는 뱀에게 물렸다는 둥 독을 마셨다는 둥.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어떻게 자살하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23.08.28)

# 54.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자녀인 카이사리온을 죽인다. 다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자녀들은 죽이지 않고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제 1의 시민이 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사실상 황제였다.(23.08.28)




책을 완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이유는 책이 재미없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만큼 즐기며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삶의 여정이 소설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내가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자료를 찾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서적처럼 느껴져 읽는 동안 즐거웠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특히 클레오파트라를 새로운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는 지금까지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떠올렸는데 이번 책을 통해 그녀가 진취적이고 용감하며 책임감있는 지도자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이전까지는 기행을 일삼고 여자만 밝히는 늙은이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의 삶과 업적들을 읽으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역사는 승자가 작성하기 때문에 대립했던 적들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패배한 세력의 기록도 살펴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무작정 승리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를 칭송하지 않으며 패배자였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악한 인물들로 몰아가지 않는다. 작가가 어느 한 세력에 치우지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고대 로마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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