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studio 2025] 다시보니 고순도

뻔할 줄 알았던 2025년의 반전

by bang

뻔할 줄 알았다.


이미 12월 중순 즈음부터 내 머릿속에 올해의 영화·시리즈·공간·음식 수상자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로 수상을 기록할까, 어떤 사진을 업로드할까 정도만 고민하면 1년 회고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12월 31일 오후에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12월 31일 오후에나 노트북을 열고 매월 올렸던 회고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기억과 생각들이 새로이 솟아났다. 이토록 콘텐츠가 많았구나, 생각이 들자 수상작을 뽑는 게 너무 어려워져버렸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올해의 수상작을 아래에 기록한다.


변별력 없으리라 생각한 올해의 지점들이 사실은 순도 높은 경험들이었구나,하는 기억으로 지난 한 해가 남을 것 같다.





올해의 순간

11월 21일, 폴 리카르 서킷 트랙 시승

: 김병훈의 박스,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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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셨다. '또 비행기 탄다'며 부러워하는 나에게 아빠는 '너도 커서 회사 돈으로 외국에 다닐 수 있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 말에는 일단 오류가 정말 많긴 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 회사 돈으로 외국에 다니는 건 전혀 상관이 없고 회사 돈으로 외국에 나가는 게 결코 좋은 건 아니다.

다만 아빠는 '회사 돈으로 너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삶', 그러니까 덕업일치를 이루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지난 11월 21일, 나는 회사 돈으로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F1이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고, 언젠가 내 눈으로 그랑프리를 볼 테야 다짐하던 내게 제네시스 GV60 마그마 월드 프리미어 출장은 덕업일치에 가까운 업무였다. 시차와 관계없이 잠을 줄이면서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게 출장의 숙명이지만, 그 모든 업무가 모터스포츠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이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본부 격인 GMR 워크샵을 취재할 수 있도록 국내 기자단을 지원했다. 이 자리에서 시릴 아비테불 감독과 재키 익스 등의 저명한 레이서 및 스태프를 만나고, GMR의 레이싱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월드 프리미어에서는 하이퍼카 GMR-001의 엔진음을 듣고, 차가 움직이는 걸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


하이라이트는 폴 리카르 서킷에서의 GV60 마그마 시승이었다.

감사하게도 기자단이 홀수였던지라 직원이 탈 수 있는 시트가 생겼고 나는 스스로를 적극 어필해 조수석에 앉았다. GMR 선수인 다니엘 훈카데야 선수가 운전하는 차는 3.4초 만에 시속 100km, 10.9초 만에 시속 200km의 속도로 폴 리카르 서킷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폭설이 내린 덕에 트랙 온도가 매우 낮아져 있었고, 차는 그립을 잃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물론 차의 제어장치와 드라이버의 실력으로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드리프트까지도 체험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고성능 차량 영역에서의 경험과 지식이 전무한지라 차량의 성능에 대한 이성적인 논평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속도를 향한 동경이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이 날을 내 '올해의 순간'으로 꼽는 감성적인 결론을 내려본다.


그 외에 너무 좋았던 순간은 아래와 같다(연대기순).

-4월 4일 윤석열 파면 선고

-8월 9일 이천 유리 공예, 도자기 공예 데이트

-10월 12일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팀 쇼런

-11월 8일 지유 누나의 임신 발표




올해의 영화

<브루탈리스트>

: 수직으로 높아지다 과거로 완성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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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스토리가 사라지는 요즘이다. 소설 원작이라던지, 리메이크라던지 따위의 방법으로 안정적인 투자와 수익을 위한 작품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고민하는 수많은 제작자가 있고, 소설 원작 또는 리메이크 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영화가 많다.

그러나 내가 꼬집고 싶은 건 '이야기의 실종'이다.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갈수록 적어지는 게 너무 아쉽다.


<브루탈리스트>는 이런 측면에서 나에게 경이로운 영화였다. 관람 직후 적었던 을 빌리자면 이렇다.

실존 인물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진 각본이어도 훌륭할 판에, 허구의 인물로 이런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혹자의 평론대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정도다. 4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인터미션조차도 영화적 경험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은 극장이 아니라면 집중해서 보기 어려운 215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영화적 경험이 점점 방구석으로 전이되는 시대에, 관객에게 극장으로 나오라고 하는 거다. 나가길 잘했다, 이런 영화를 다시 보기 어렵겠다, 싶은 작품이었다.


게다가 올해 유일한 별 다섯 개 영화이자, 관람한 2월 18일부터 316일 동안 '올해의 영화' 수상을 찜해놓은 작품이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작품과 한줄평은 아래와 같다.

-2위: 세계의 주인; 연대는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하는 건 왜 그리도 어려운 걸까

-3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느릿한 상승과 하강이 오래도록 남는다




올해의 음반

이찬혁 - EROS

: 간만에 사랑이 넘치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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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좋은 음반이 참 많았다. 리스트로 적자면 아래와 같다. '올해의 음반'의 강력한 후보 리스트이기도 하다.

-parcels - LOVED

-Vulfpeck - Clarity of Cal

-Justin Bieber - SWAG & SWAG II


동시에 이 모든 음반들에서 각각의 아쉬움이 크게 다가오기도 했다. parcels는 선공개한 곡들이 너무나 완벽했기에 '이 앨범이 얼마나 즐거운 청각적 경험을 줄까' 기대하게 만들더니, 정작 음반에서 좋은 곡이 선공개 곡뿐이라 너무 허무했다. Vulfpeck은 올 초 내 플레이리스트를 가득 채웠지만, 생각보다 여운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Justin Bieber는 원래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아님에도 너무 듣기 편하고 좋은 노래가 많았다. 그러나 올해의 음반까지는 아니었다.


이찬혁의 앨범은 기대가 크지 않아서인지(원래 악동뮤지션을 비롯해 이찬혁의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허무함이 없었다. 오히려 들을수록 새롭게 좋아지는 곡이 많았다. 여운도 길어서 한 곡을 집중해 듣다가도 이내 다른 곡에 빠져들고, 지루하던 곡이 다시 좋아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라이브를 한 영상이 결정적이었다. 음원과는 또 다른 이 앨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음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올해 가장 좋았던 라이브 영상은 parcels의 tiny desk였다.

꼭... 봐주세요...




올해의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 김병훈을 가장 많이 울린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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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대를 초월하는 콘텐츠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이병헌이 한라산에 올라 어머니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세대를 초월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다른 세대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폭싹 속았수다>는 세대를 초월하는 걸 넘어, 세대끼리의 대화를 대신 해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감히 평해 본다. 우리 가족에게는 특히 그랬다. 드라마를 보며 찢어지게 가난한 조부모 세대의 삶을 엿보게 해 주었고, 그걸 본 부모님은 연결고리가 되어 나에게 조부모님의 삶과 본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철부지 시절을 보는 것 같던 애순이는 어느새 희생하는 우리 엄마가 되고,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짜식' 소리가 나오게 하던 관식이는 어느새 듬직한 우리 아빠가 됐다. 내가 짠하게 보던 금명이는 내 모습이었고, 우리 엄마의 어린 시절을 엿보게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처절하고 내 이야기, 우리 가족의 이야기 같아서 보는 내내 눈물을 이렇게 흘린 적 있나 싶게 울었다. 특히 발리 가는 비행기에서 현지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


세대를 초월하는 작품은 힘이 정말 세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작품은 아래와 같다.

-2위: 귀멸의 칼날; 다시금 날 오타쿠가 되게 한, 근데 더 이상 오타쿠만의 작품은 아니게 된...

-3위: 환승연애; '연애 프로그램 대체 왜 봐?'에서 '다음 화 언제 봐?'로



올해의 공연·전시·경기

광복 80주년 KBS 대기획 <이 순간을 영원히, 조용필>

: 음악이 사람을 울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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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사람을 울릴 수 있을까. 마음을 울리는 거 말고 진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 '나는 가수다' 방송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정도인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난 9월 6일, 가왕 조용필의 무대를 보고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바람의 노래 전주를 듣자마자 감상을 논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것이다. 음악은 사람을 울릴 수 있다.


바람의 노래만 좋았던 건 당연히 아니다. 모든 곡이 좋았다.

지금까지 가본 모든 콘서트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모르는 곡이 나왔을 때 뻘쭘한 게 하나, 모르는 곡이 나오더라도 좋은 게 또 다른 하나다. 어쨌든 모든 공연에는 모르는 곡이 있었다.

조용필의 콘서트에서는 모르는 곡이 없었다. 잘 아는 곡과, 어디선가 들어본 곡뿐이었다. 더 놀라운 지점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함께 공연을 본 부모님과 형, 형수와 현지 모두 이 감상을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아티스트가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세대를 초월해 갈등을 봉합하는 힘을 음악이 가지고 있구나 느꼈다.


이외에도 온 가족이 한 차를 타고 이동하고, 스카이박스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공연 외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은 하루다.


관람 직후 적었던 평을 다시 가져온다.

-먼저 음악의 힘은 엄청나다는 거다. 어떤 팟캐스트였나, 이 시대의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는 정치도 영화도 아닌 음악에게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조용필 콘서트는 그 말이 증명되는 현장이었다.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모두의 부모님이 즐기는 건 물론, 자식세대조차 락스타의 공연에 온 것처럼 방방 뛰게 만드는 힘을 가진 아티스트가 이 시대에 몇이나 있을까 싶다.

-밴드의 힘은 엄청나다. 밴드 '위대한 탄생'이 선사하는 사운드의 힘이 엄청났다. 무대와는 꽤 먼 거리의 좌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워풀함이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실내 무대여서 그런지 음향도 너무나 좋았다.

-어쩜 저리 안 늙으실까. 일흔다섯이란다. 말도 안 된다 했다. 무대 장악력을 위해서는 체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 게 틀렸음을 깨달았다. 무대 장악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경험으로, 음악으로 하는 것이더라.

-나도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음악을 듣고 감정이 동요하는 사람들이 난 참 신기했다. 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 이제는 그들을 이해한다. 나도 그래봤으니까. 아무런 생각이나 감동 없이 그냥 흐르는 눈물이 있더라는 것을 바람의 노래 전주를 듣고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공연·전시·경기는 아래와 같다.

-2위: 캐즘타파 공연(자세한 내용은 6월 참고)

-3위: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4월)

-그 외: FC바르셀로나의 24-2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전(vs 인테르), 오아시스 내한 공연




올해의 지름

일렉기타 페달보드 일체

: "소리가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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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일렉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지 15년이 됐다.

그 긴 시간 동안 이해하지 못한 게 일렉 기타를 치는 사람들은 꼭 장비가 많다는 사실이다. 기타는 물론이고 페달 보드를 꼭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데 왼손으로 운지를, 오른손으로 피킹을 하면서 톤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기에 발로 조작할 수 있는 페달 보드가 있어야만 연주 중에 톤을 바꿀 수 있다. 이게 정말 무겁기도 하고 세팅과 정리에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고 그에 반해 드라마틱한 차이는 안 나는 것 같아 오랜 기간 볼륨 페달만 가지고 연주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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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올해 연주 중에 더 다양한 소리를 내려면 페달 보드 하나를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에 페달보드 구상을 시작했다. 몇 주 동안 어떤 페달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까 고민했고, 재정적 한계로 인해 중국산 페달을 알리에서 주문해 택배를 기다리는 데 또 몇 주를 썼다.

그 끝에 나만의 페달보드를 맞췄고,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 주일마다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페달보드를 맞추고 써보니, 페달 보드의 진짜 매력은 조작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구상과 활용에 있다는 걸 알았다.

-구상: 내가 원하는 톤을 만들기 위해 어떤 페달이 필요한 지 공부하는 과정이 재밌다. 가령 오버드라이브 페달과 코러스 페달이 필요한 소리를 만들고 싶다면, 수많은 오버드라이브 페달과 코러스 페달의 소리를 들어보고 공부한다. 페달의 순서도 고민해야 한다.

-활용: 구상에서 끝난 게 아니다. 여러 페달의 조합을 바꾸며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가령 오버드라이브 페달과 디스토션 페달이 있다면 이 중 어떤 걸 쓰냐, 혹은 둘 다 쓰냐에 따라 소리가 완전히 달라진다. 연주하다 마음에 안 들면 순서를 다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상술한 것처럼 일렉기타를 연주하며 페달 보드를 통해 새로운 재미를 올해 많이 느꼈다. 재미있으면 된 거고, 내 취미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면 올해의 지름으로 선정하기에 족하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지름은 아래와 같다.

-2위: 애플 홈 팟; 강력한 후보였으나, 현지가 사 준 선물이다. 내 돈이 안 들어갔기에 선정할 수 없다.

-3위: 이케아 NÄVLINGE 네블링에 조명; 자취방에 꼭 맞는 빛을 제공한다




올해의 공간

전라남도 구례군

: 따뜻함으로 가득한 종합 행복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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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돌이켜보면 크게 두 번의 여행이 떠오른다. 상반기에는 발리를, 하반기에는 구례를 갔다.

올해 가 본 수많은 공간 중 이 두 곳 중 하나를 '올해의 공간'으로 선정하고 싶었다.


두 번의 여행 모두 완벽했다.

발리는 매혹적인 풍경과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보여줬고, 인센스 향과 발리 사람들의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허나 여행자의 시선을 가지고 돌아다녔기에 발리라는 장소는 묘하게 타지의 느낌으로 남아있다.

구례는 여유 있게 살아가는 로컬의 모습을 보여줬고, 따뜻함과 정겨운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마치 내가 구례의 로컬이 된 것처럼, 은퇴 후에 구례에서 살면 재미있겠다 생각하며 돌아다닌 것 같다.


구례서일까. 구례의 따뜻함을 올해의 공간으로 꼽고 싶다.


숙소인 구례마루는 매일 아침 새로운 절경을 보여줬다. 산속에 파 묻혀서인지, 구례에 쏙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순대백화점에서 먹은 순대국밥과 방석창국밥은 파김치를 곁들였을 때 깔끔한 강렬함을 선사했고 지리산오여사의 닭가슴살카츠는 요리가 곧 정성임을 느끼게 했다. 감사하게도 현지는 내가 해 준 바베큐를 올해의 음식으로 꼽았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본 구례는 그 어떤 전망대에서 바라본 어떤 도시보다도 친근하게 멋졌고 지리산 스카이런에서는 스릴과 절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들녘밥상은 말 그대로 신토불이였고 소식다료의 차는 웰니스의 중요성을 주창하는 듯했다. 이외에도 구례에는 오목눈이풀숲, 집밥 김병훈선생, 환승연애 정주행 등등 수많은 추억이 있다.


구례는 내게 어쩌면 공간보다는 추억으로, 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따뜻한 기억, 구례를 올해의 공간으로 꼽는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공간은 아래와 같다.

-2위: 발리

-3위: 5월 25일 현지와 찾은 가평과 청평 일대

-그 외: 9월 13일 현지와의 난지 한강공원, 송파 대박만화방




올해의 음식

발리 나시 짬뿌르 (Nasi Campur)

: 파리가 앉아서 그런지 더 맛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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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포를 좋아한다. 자주 이야기하는 말이다.

식당은 당연히 청결해야 하지만,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장소에서 먹는 음식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가령 순대국밥 가게에서는 적당히 꼬릿한 향이 나야 하고, 칼국수와 보리밥을 취급하는 식당이라면 양파와 무 따위가 너저분하게 놓여있어야 한다.


나시 짬뿌르는 일종의 발리 백반 요리이다. 한 접시에 쌀밥을 비롯한 각종 반찬을 담아서 주는데, 반찬은 가게마다 다를 수 있다고 한다. 기사 식당이나 한식뷔페가 가장 유사한 한국 음식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기사 식당은 결코 깨끗한 이미지가 아니다. 후딱 들어가서 후딱 먹고 떠나는 곳이기 때문에 청결함보다는 가성비와 속도,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발리에서 현지와 먹은 나시 짬뿌르도 그랬다.

오전 내 서핑을 배우며 칼로리를 소모한 뒤 기분 좋게 마사지를 받고서 햇살을 즐기며 걷다 식당에 들어갔다.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 없는 식당이었고 손님은 없이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사장님과 강아지뿐이었다.


나시 짬뿌르를 주문하자 쇼케이스에서 밥과 반찬들을 담으시는데,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분명 꺼려질 만한 상황인데, 묘하게 '이거지' 싶었다(한국에서는 파리 나오면 바로 일어났을 거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음식을 먹는데, 짜고 자극적인 맛이 혀를 타격했다. 한국에서 먹어본 적 없는 종류의 짠맛인데, 이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먹다 국이 당겨서 돼지고기 기반의 국 요리를 주문했다. 어떻게 주문한 건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대충 메뉴를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묻자 사장님이 냅다 냄비를 열더니 국을 퍼줬던 것 같다. 국에도 파리가 좀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게 또 최고의 발리 해장국이었다.


음식은 맛보다는 경험이다. 식당에 가는 기대감부터 입장할 때의 향과 풍경, 먹을 때의 감상과 나와서의 기분까지 모든 게 '맛'이다.

발리에서 먹은 나시 짬뿌르는 꾸미지 않은 발리 그 자체의 '맛'이었기에 너무 강렬했는지도 모른다. 올해의 맛으로 선정한다. (바로 여기다)


그 외에 포디움에 오른 음식은 아래와 같다.

-2위: 구례 순대백화점의 순대국밥과 방석창국밥

-3위: 직접 만든 샌드위치들

-그 외: 현지 생일에 먹은 '페스타 바이 민구' 런치, 평창 남원식당, 서초 흑미원조2018 식물원김밥





서론에서 말했듯이, 올 해의 회고 시상식은 뻔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다. 한 해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의 깊이를 예단한 건 아닌가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너는 생각보다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며 나를 응원하게 된다. 2026년도 나는 그렇게 깊이 있는 삶을 살 거다. 그 깊이를 느끼고, 그 깊이를 통해 성장하는 한 해를 살아가봐야지.



연말 회고 루틴으로 나만의 시상식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연말이면 이 시상식을 통해 한 해를 돌아볼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올해는 처음으로 게시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는 걸 느꼈다.

여러모로 이 시상식에 나의 연말 동기부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내년에도 잘 살아보자, 그리고 내년의 시상식이 더 치열하도록 더 많이 보고 느끼자 다짐하게 된다.



2025년 송구영신 예배에서 접한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담쟁이 같은 한 해를 보내길 소망해 본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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