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2025년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유의미한 영화! <세계의 주인>
1.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 / 피해자다움이라는 프레임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맥락을 빚어 간다.
'주인'은 또래의 여느 여고생들처럼 밝고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출소한 성폭력 범죄자와 관련한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수호'와 충돌하기 전까지 주인은 아직 미래의 목표이자 꿈을 정하지 못한, 미지의 상태인 고등학생이었다. 대학 입학에서 유리한 점수를 얻기 위해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것이 빤히 읽히지만, 수호는 정의로운 일을 수호하는 듯 자신의 행동에 당위를 부여하고, 정당화한다.
그런데, 수호가 들이민 서명 페이퍼에는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이 적시되어 있다. 주인은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에 반감을 가지고 서명을 거부한다. 누구나 흔히, 쉽게 말하는 '피해자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며 일상이 파괴된 채로' 살고 있다는 수호의 전제를 부정한 것이다. 수호의 문장은 마치 피해자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시적 제언처럼 느껴지는데, 주인은 그 '언술 행위'를 거부하면서, 농담처럼 자신도 피해자라서 잘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농담이라고 말하면서 원성을 산다. 피해자의 고통을 농담 거리처럼 가벼이 여기는, 현실 감각 부재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은 실제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임이 밝혀진다. 그제야 주인의 엄마가 왜 술로 시름을 달래게 되었는지, 주인의 아빠가 주인의 문자 메시지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게 된다. 수감된 삼촌이 지속적으로 보내오는 편지를 동생 해인이 왜 감추고 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는 피해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가 속한 세계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파괴되는 일이다.
2. 자기 결정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삶이 되었든, 온전히 '주인'의 몫이다. 주인이 겪어내고 이겨내고 하나씩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세계의 주인이며, 자기 결정권을 가진, 자유 의지로 자신의 삶을 구축할 수 있는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단지 피해자로만 수식하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우리 사회가 흔히, 쉽게, 자주 하는 언어의 프레임을 거부한다. 주인은 크레온의 실정법에 양심법으로 맞서는 안티고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거부하고, 반대하고, 저항한다. 온전히 자기 의지로 자기 삶을 결정한다. 생생한 자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주체이다.
3. 일상을 살아내는 힘, 사랑
우여곡절을 겪고, 주인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적은 종이를 담임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미지의 상태로 남겨뒀던 주인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제출한 종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이라니!
주인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어떤 '일'을 꿈꾸지 않는다. 밝고 따뜻한 태도로, 세상을 향해 '사랑'부터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당당하고 원대한 사랑을 도대체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의 시원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회복탄력성이나 자존감과 같은 단어로는 감히 수식할 수 없는 '사랑'이다. 심연의 중심에서 뻗어져 나온 뿌리 깊은 사랑의 에너지는 관객의 가슴과 머리를 강타하기에 충분했다.
언어는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하지만, 어떤 언어들은 구분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잡다기한 감정을 수반해 언어 너머의 존재들까지 추락시킨다. 모욕감을 부추기고 르상티망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래서 더 크고 포용적인 언어로 상대와 조우해야 한다. 더 포괄적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4. 좀 더 포용적으로
포용적 예술을 지향하며 장애를 인간 존재의 '연약함'이라고 표현한 아녜스 앙리와 성무량, 이자벨 아노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장애를 '연약함'이라는 포용적 단어로 표현하니, 한 데 섞인 우리를 구별 짓기 할 이유 자체가 사라졌다. 워크숍에 참여한 모두는 함께 움직이고, 어울렸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과 글이 가진 위대함에 매료되어 문장을 고치고 다듬는 일에 내가 가진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살고 있다. 개념과 관념을 언어로 정의해 풀어내기를 좋아한다. 묘사하고 진술하며 세계를 창조하고 조립해 나간다. 그래서 언어생활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고 어쩌면 나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언어로 규정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산다. 그래서인지 수식인 동시에 프레임이 되고, 막연하면서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을 자주 목격한다. 그렇다 보니 말을 하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자주 어려움에 빠진다.
그래서, 좀 더 포용적으로, 좀 더 포괄적으로 세계를 아우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세계의 주인>이 포괄하고 있는 이 사랑 충만한 세계가, 이 우주가 더 많은 이들의 심연까지 속속 스며들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한다. 2026년에도 계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