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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Sep 14. 2022

소아 강박증.

너의 아픔이었던 강박증.

소아 강박증.


강박적 사고란 어떠한 생각이나 장면 혹은 충종이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반복적으로 떠올라 이로 인한 불안을 느끼는 것이고 강박 행동이란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일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가장 흔한 증상으로는 오렴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외 자신이나 다른 사람, 특히 친한 사람이 해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무서운 재앙이 일어날 것 같은 걱정, 불행과 연관된 숫자 생각, 집안 물품에 관한 걱정, 특정 단어, 소리, 음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균형 또는 정확성에 대한 충동들이 있다. 가장 흔한 강박증으로는 지나치게 손을 씻거나 피부가 닳도록 목욕하기, 옷 갈아입기, 청소하기, 배설물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한 회피행동, 점검하기. 숫자 세기, 반복하기, 만지기 등이 있다.   -네이버 건강백과사전-





 내 나이 21살.

우린 어린 엄마가 되었고 어린 아빠가 되었다.


그 어린 부모는 어여쁜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길을 가도 마트를 가도 사람들이 한 번은 다시 돌아와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갈 만큼 예쁜 아이 었다. 어린 부모는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키우겠다고 다짐을 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 다짐은 그냥 내뱉은 숨처럼 공기 중에 사라지는 말 같았다. 우리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크게 싸우곤 했다. 그냥 말다툼이 아니었다. 서로를 아프게 하고 집안의 물건이 부서지고... 신랑이 집에 없어야 집안이 조용했다. 왜냐하면 우린 서로를 보면 탓을 하고 으르렁대며 싸우기 바빴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런 우리를 보고 커 나아갔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싸움에도 한번을 울지 않았던것 같다.


아이는 한 살 두 살... 조금 특이한 성향을 보였다.


스티커 놀이를 할 때면 반복되는 패턴으로 삐뚤어지지 않게 줄을 맞춰 붙이곤 했다. 난 아이가 꼼꼼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스티커뿐만 아이 었다. 미니 자동차들도 항상 줄을 맞춰 세워두곤 했다. 이것 또한 나는 아이가 야무지고 꼼꼼한 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이는 점점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만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엇나가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색칠 공부를 하다 선 밖으로 삐져나가면 그 종이를 다 꾸기거나 찢어 버리고 다시 새 그림에 색칠을 시작을 했다. 아무리 옆에서 괜찮다 잘했다고 말을 해줘도 아이의 마음에 와닿지 않은 듯했다.


커가면서 좋아지겠지 하던 내 바람은 더욱 다른 문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밖을 나가면 풀밭이고 흙길이고 발도 대지 않으려 했다. 처음엔 아이가 풀이 무섭고 흙이 신발에 들어가는 게 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친구들이 흙길, 풀숲에 들어가면 우리 아이는 저 멀리 길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화가 났다. 뭐 그리 깔끔을 떨겠다고 흙도 풀도 물도 몸에 안 대려고 하는지... 


한 번을 화를 내보았다. 그냥 들어가 보라며. 발을 대보라며. 흙을 만져보라며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화를 내는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서있기만 했다. 이때 이상한 점을 느꼈어야 했다. 내가 둔했던 거 같다. 아이가 커갈수록 어김없이 우리는 서로를 보면 으르렁대고 큰소리를 치며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기분에 아이를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아 아래 입술을 피가 나기 전까지 빨개지도록 꽉 물고 있는 게 아닌가... 신랑과 싸우고 있던터라 화가난 감정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가 왜 입술을 깨물고 있나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머리를 한대 쿵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보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입술은 피가나기 전이었다. 우리 아이는 부모의 큰 싸움과 집안의 물건이 부서지는 그 환경에서도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고 있던 것이다. 


그때 한참 아이를 바라보며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아이와 심리상담소를 찾아 갔다. 불안이 만들어 낸 소아 강박증이라고 했다. 나의 깨달음은 아이가 많이 아프고.. 병들고 난 후였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나를 다스려 보았다. 

그 후로 나는 신랑과는 싸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화를 누르곤 했다. 아이와의 시간이 일분 일초도 아까웠기에......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하려고 노력을 했다. 


심리상담소에 찾아갔다. 아이는 불안이 강박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함께 줄을 맞춰 스티커를 붙이며 삐뚤어지면 아이에게 물어봤다.

그림을 색칠하다 선 밖으로 나가도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강박의 문제를 들추기보단 그 강박을 함께 경험하며 규칙이 어긋나면 아이와 함께 해결해 보려고 했다. 


처음 아이는 엄마의 삐뚤어진 스티커와 선 밖으로 나간 색을 보며 종이를 찢어 버리며 힘들어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틀린 부분에 해결책을 함께 의논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던 와중 우리는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옆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해 함께 해주었다. 외할머니도 항상 한결 같았다. 


아이와 놀이를 하며 규칙이 어긋 났을 때 


" 할머니는 이렇게 삐뚤어져도 좋은데 너는 어때? 어떻게 하면 좋겠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해볼까?" 


아이는 모든 걸 다시 만들고 다시 색칠하고...이런 시간이 반복이 되었다. 어느 날 


" 엄마가 색이 삐져나갔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느낌 있고 귀여운 그림 같은데 너는 어때?" 

" 응 괜찮은 거 같아, 엄마 나도 요기 조금 삐져나갔는데 꼭 뿔 같지??"


가슴이 메어왔다. 아이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아픔에서 빠져나오는 빛이 보이는 듯 보였다. 

노력해준 우리 아이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아이의 아픔은 모두 부모가 만든다고 했다. 

그 말에 1000프로 동의한다. 첫 아이여서 몰랐다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그냥 우리 부부가 어렸고 이기적이었다. 아이를 생각하지 않았고 서로의 편함을 위해 싸운 것이다. 


그사이 아이는 병들어 갔다. 그때 '아이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더 늦지 않게...... 발견하게 해줘서 고마웠다. 


반짝이는 보석처럼 귀한 아이에게 아픔이 아닌...상처가 아닌... 

지금은 행복이라는 감정만을 전해주려 노력한다.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막내에게도 나는 부족하고 상처를 주는 엄마였다. 

하지만 아이의 아픔을 발견하면서 모든게 달라졌다. 우리는 부부상담. 심리상담. 서로에 대한 배려.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욱하는 성질이 어디로 가진 않았다. 한번씩 욱! 올라오지만 크게 싸우지 않고 대화를 통해 풀어가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알아봐 준걸까?..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바뀌었다. 성격도 너무 밝아 졌다.

부모가 아프게 했던 아이들은 이미 사춘기 언니, 오빠가 되었다. 어릴 적 아픔이 아직은 마음에 남아 있겠지만... 그 아픔이 되살아 나지 않도록 나는 앞으로도 더 노력하고 아이와 함께 소통하며 지낼 거라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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