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의 왕. ‘김이버’
3일 뒤 비뇨기과 예약을 잡고 우리 부부는 정액 검사 결과에 대해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 별일 아닐 거야. “
“어. 알겠어. “
라는 그냥 형식적인 대화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남편은 불편한 주제의 대화를 지금도 하기 싫어하지만,신혼 초에는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대화를 하게 되어도 항상 제삼자처럼 대화를 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편 머릿속도 복잡할게 뻔하니, 굳이 병원 방문 전까지 아예 이 주제의 대화를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이 순간에 무슨 말을 하든, 남편에게는 ‘너 때문에’라고 들리거는 뻔한 문제이니, 남편이 이 주제의 대화를 꺼내지 않는 한, 입을 닫아 주는 게 남편에 대한 배려라고도 생각했다. 나 또한 이미 심신이 매우 지쳐버린 상태이기에, 불필요한 말싸움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시기에 웃기게도 난 적극적인 임신을 위해 회사를 퇴직한 후 이직을 하지 않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몸으로 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나는 결혼 전 사고로 다친 몸을 혹사시켜 자연임신이 안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둔 것이다. 고로 남는 게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다양한 애칭? 같은 별명을 수시로 만들어주는데, 내 애칭 중에 하나는 ‘김이버’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나는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바로 녹색검색창에 검색하고 꽤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서치 하는 버릇이 있다. 남편은 종종 나를 녹색 검색창처럼 활용을 했다. 이런 나의 능력치가 이 시기에는 나를 병들게 했다.
시간이 많은 나는 남편이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미친사람처럼 검색하고 울고, 서치하고 울고 하는 짓을 반복했다. 내가 운 게 티 나면 불편해할 남편을 위해 퇴근한 남편 앞에서는 웃고 떠들고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속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불고 하소연하면서 내 이 상황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굴뚝같았지만, 남편한테도 할 수 없었고, 가족한테도 할 수 없었고, 친구한테도 할 수 없었다. 나 혼자만에 속앓이가 시작되었다.
난 평소에는 밝고 유쾌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터지면 더 많이 걱정하고, 더 멀리 걱정하고, 스스로 더 깊게, 땅밑으로 꺼지는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나는 이 시기에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어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남편이 잠들고 난 후에 거실에 조용히 나와 술을 마셔야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9년 전인 그때는 아무리 검색을 하고 검색을 해도 남성불임에 대한 정보는 정말 개미똥구멍만큼이나 없었다. 인터넷창에서 남성난임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기이었다.
병원 방문 전에 검색으로 알아낸 거라고는 남성난임은 “폐쇄성무정자증“과 ”비폐쇄성무정자증“으로 나뉘며, 폐쇄성무정자증은 약물이나 간단한 시술로 정자채취가 가능하여 2세를 가질 수 있으나, 비폐쇄성 무정자증은 그냥 절망뿐? 정도이었다.(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시다면 현시점에는 단어 검색만으로도 인터넷상에 아주 정보가 넘쳐나고 있으니 검색하시길 권유드린다.)
개미똥구멍만큼이나 없는 정보를 반복해서 또 읽고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카페에는 모조리 가입신청을 넣어두었다.
제발 비폐쇄무정자증만 아니기를, 더 이상 저주가 내리지 않기를 빌고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