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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Aug 14. 2022

서울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

지방에서 산다는 것

2022년 최고의 드라마 화제작은 단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일 것이다.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인데,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력, 빠른 전개 속도까지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마음에 들어 매주 챙겨보고 있다. 드라마가 끝나면 못내 아쉬워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우영우> 관련 게시물을 뒤적이며 여운을 달래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드라마 속 디테일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얼마 전에는 “사랑꾼 이준호”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클릭했다. 이준호가 우영우를 집에 데려다주는 장면이 나온 날이었는데, 둘의 직장은 역삼역, 우영우의 집은 합정역, 이준호의 집은 성수역이라는 설명만 적혀 있었다.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300km 넘게 떨어진 지방에 사는 나는 저 문장의 속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댓글을 꼼꼼히 읽고 역삼역과 합정역, 성수역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우영우와 이준호의 집이 직장을 중심으로 정반대 방향에 있는데, 우영우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온 이준호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예찬이었다는 걸. 처음부터 합정역과 성수역이 지하철 2호선 끝과 끝에 있다는 걸 알려줬다면 나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럴 땐 지방에 사는 게 서글프다.


이런 일은 꽤 자주 있다. 서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서울의 지리를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순천이 어딘지 모를까 봐 꼭 ‘전남 순천’에 산다고 말하는데, 서울 사람들은 다짜고짜 신림이니 논현이니 하는 지명을 꺼낸다. 지방러인 나는 신림이나 논현이 서울에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나에게 ‘서울에 살아요.’와 ‘신림에 살아요.’는 같은 문장이다. 가끔 정말 생소한 동네 이름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십중팔구 서울에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곳의 시, 군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동네 이름부터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울 사람이기 때문이다.


번은 택배를 보낼 일이 있어 상대방에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상대방이 보내준 주소는 ‘백제고분로’로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상대방이 나의 한국사적 소양을 테스트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백제 전성기 지도를 떠올렸다. 남한의 서쪽 전체가 백제 땅이었는데 그중에 고분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수도에 있지 않을까? 백제는 위례성에서 웅진,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두 번 옮겼는데 백제고분로는 그중에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 군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동네 이름부터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울 사람이다. 검색해본 결과 역시나 백제고분로는 서울에 있었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며 꺄르륵 웃는 사람들을 보며 지방 사람인 나는 어쩐지 소외감을 느낀다. 아마 방송을 만드는 제작진이나 방송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대부분 서울 사람이라 지방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무지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가끔은 부연 설명 때문에 더 큰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가령 거리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차로 몇 시간 거리’ 라거나 ‘몇 km 떨어진 거리’라고 말하면 지방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강남에서 홍대까지 정도의 거리’라고 말하면 설명을 들으나마나다. 면적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뉴스에서는 자주 ‘여의도 면적의 몇 배’라는 표현을 쓰는데 도대체 그놈의 여의도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감이 안 온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살고 있다.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 인구의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권에 살고 있는 절반의 국민이 지방에 살고 있는 나머지 절반을 배려해줬으면 좋겠다. 더는 모두가 배를 잡고 웃을 때 혼자만 왜 웃는지 몰라 멀뚱멀뚱 앉아있고 싶지 않다. 서울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불친절한 설명을 듣고 스마트폰을 꺼내 강남에서 홍대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 지 검색하고 싶지 않다. 방 사람도 외감 느끼지 않고 서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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