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때는 2000년, 전라남도 여수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국어 시간에 배운 표준어의 정의를 달달 외우다 어쩐지 심통이 났다. 또래 아이 중에 자기가 사는 지역을 스스로 선택한 아이는 거의 없을 터였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표준어를 쓰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수에 살게 된 나는 사투리를 썼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라는데, 그럼 나는 교양이 없다는 건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의 전개라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래도 그냥 심통이 났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쭉 살다가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내가 입만 열면 서울 아이들이 내 말을 따라 했다.
"쟤 부산에서 왔대."
"우와 사투리 쓰네?"
"신기하다."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입을 다물고 귀를 열었다. 학교에 있는 동안 서울 애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집에 가서 혼자 서울말을 연습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부산 촌뜨기라고 놀리는 아이는 여전히 있었어도 내 말투를 따라 하는 아이는 없어졌다.
몇 년 뒤 나는 여수로 전학을 갔다. 이번에는 여수 사투리를 배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새 서울말을 다 잊고 여수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부산 사투리는 "오빠야~"같은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근디", "그랑께"같은 전라도 사투리는 촌스럽고 투박하기만 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전라도 사투리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수능을 준비할 때였다. 언어영역에는 가끔 맞춤법에 관한 문제가 나오기도 하는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깨끗이/깨끗히' 는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헷갈리는 단골 문제였다. 매번 틀리는 우리를 보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전라도 사람이라서 이게 헷갈리는 거야. 너희는 사투리를 쓰니까 '깨끄치'라고 발음을 하잖아. 서울 애들은 안 그래. 걔네는 원래 '깨끄시'라고 발음을 하니까 당연하게 '깨끗이'라고 생각하지."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것도 억울했는데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표준어도 공부해야 한다니. 내가 '깨끗이'가 맞는 말이라는 걸 공부하는 동안 서울 애들은 수학 문제 한 문제라도 더 풀 수 있을 테니 서울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투리를 쓰는 사람으로서 처음 난관에 부딪힌 건 무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시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그림을 보고 단어를 쓰는 문제였는데, 예를 들어 고양이 그림 아래에는 '고양이', 인형 그림 아래에는 '인형'이라고 쓰기만 하면 됐다. 시험지에는 자전거 바퀴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바퀴 그림 아래에 있는 괄호에 연필로 '발통'이라고 적었다. 늘 쓰던 말이었는데 글로 쓰고 보니 이상했다. 머릿속으로 발통을 계속 되뇌었다.
'발통, 발통, 발통... 맞는데.. 이거 분명 발통인데... 그런데 글로 적힌 발통은 왜 이렇게 낯설고 이상하지?'
결국 자신이 없어진 나는 지우개로 발통을 지우고 시험지를 제출했다. 나중에 정답이 '바퀴'라는 걸 알고 아쉬워서 오른발로 땅바닥을 쿵쿵 찧었다. 사투리가 익숙한 나는 쉬운 단어 하나도 표준어로 생각나지 않았던 거였다.
사투리: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
살면서 사투리를 써서 좋았던 적이나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사투리는 내가 지방 사람이라는 낙인,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 영화에서 조폭의 거친 성격을 드러내는 수단, 뭐 그런 거였다. 특히나 특정 지역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데에는 사투리만큼 훌륭한 수단이 없다.
부산 출신 배우 김정현이 한 인터뷰에서 "사투리를 어떻게 고쳤냐?"는 질문에 "사투리를 고친 게 아니라 표준어를 익힌 거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투리는 지역적 특색이 담겨있는 말일 뿐 잘못된 말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사투리를 고치다'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사투리를 쓰는 나조차도 사투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사투리를 쓰면 불편한 점이 분명히 있다. 이런 의사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이 표준어라고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사투리를 쓰는 게 잘못된 거나 고쳐야 할 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투리를 고친 게 아니라 표준어를 익힌 거라는 배우의 말에 따르면 나는 경상도, 서울, 전라도를 모두 거쳤으니 3개 국어는 아니더라도 3개 지역어는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자다. 처음으로 사투리를 쓰는 게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