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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난 오늘도 아무거나 먹을게요

자존감이 낮아 결정을 잘 못하는 사람의 메뉴 고르기

by 김채원

약속을 잡는다. 날짜와 시간이 정해지면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은 "뭐 먹을까?"

그리고 내 대답은 항상 "아무거나"


'아무거나'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지만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 좀 밝히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음식 취향에 자신이 없어서다. 자존감이 낮아 눈치를 많이 보는 탓인 것 같다. 모두가 찍먹파인 모임에서 혼자만 부먹임을 커밍아웃했다가 '먹을 줄도 모르는 놈'이 될까 봐 걱정된다. 나는 짬뽕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중국집은 짜장면이지"라고 한다면 괜스레 어깨가 낮아질 것 같다. 원래는 연어 초밥을 좋아하는데 그 날따라 유독 계란말이 초밥이 먹고 싶어 계란말이 초밥을 시켰다가 '회를 잘 못 먹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다. 내가 무심코 고른 음식이 내 취향 전체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쉽게 고르질 못하겠다. 비싼 건 먹어본 적도 없는 싸구려 입맛인 게 사실인데 상대방이 '쟤는 싸구려 입맛'이라고 기억할까 봐 망설여진다.


두 번째 이유는 진짜로 내가 아무거나 잘 먹어서다. 평소에 절대로 못 먹는 게 있다면 그건 천엽이나 생간 같은 거고 그건 내가 아무거나 먹자고 했을 때 상대방이 고를 확률이 희박한 거다. 살다 보니 아무거나 잘 먹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가 않더라. 내 주변만 해도 치킨을 안 먹는 사람, 돼지고기를 안 먹는 사람, 구운 고기는 먹지만 삶은 고기는 안 먹는 사람, 해물을 안 먹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이 가리는 음식을 다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상대방이 고르도록 하는 게 편하다.


세 번째 이유는 밥 먹으면서 투덜대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으면서 유난히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8,000원 짜리라는 게 말이 되냐는 둥, 조미료 맛이 많이 난다는 둥,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다는 잘 만들겠다는 둥의 얘기를 들으면서 밥을 꼭꼭 씹어 삼킬 자신이 없다. 물론 맛이 없다거나 양이 적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꼭 그런 사람들은 1절에서 안 끝내고 2절 3절 밥 먹는 내내 투덜댄다. 그럴 때는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온다. 만약 내가 메뉴를 골랐는데 상대방이 그렇게 투덜댄다면 가슴에 커다란 돌을 얹고 밥을 먹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이제는 항상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일도 눈치 보인다. 본의 아니게 메뉴 고르는 수고를 상대방에게 다 떠넘겨버렸으니 말이다. 미안한 마음에 한 번씩 내가 메뉴를 골라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기보다는 상대방이 먹고 싶어 할 만한 것을 고르려고 노력한다. 도저히 모르겠으면 '어디가 유명한 맛집이라더라'며 내가 골랐지만 내가 고른 게 아님을 확실히 말해둔다. 밥 한 번 먹는 게 정말 어렵고 복잡하다.



이 글을 쓴 지 거의 한 달이 된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자존감을 많이 회복했고 결정을 잘 못하는 것도 많이 극복했다.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전부터 꾸준히 노력한 결과다. 글은 그 노력 중 하나였다. 내가 왜 결정을 못하는지 생각해보고 글로 옮겨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난주에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가고 싶은 술집과 내가 먹고 싶은 안주를 골랐다.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었다. 집에서도 남편에게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된장국을 끓였다. 결정을 쉽게 못하는 사람으로 10년을 넘게 보냈는데 그동안 내가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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