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불행을 막을 수 없다
더 이상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불행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겠다
TV에서 어떤 사고의 피해자가 나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허망한 표정에서 그 말이 100퍼센트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안쓰러웠다. 저런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 저런 일을 당하다니. 나는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그때부터 나한테 생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불행들을 미리 떠올려봤다. 그리고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항상 준비하고 있었어요."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조금 만족스럽다. 아무렴 모르고 당했다고 말하는 것보다야 백번 나아 보였다.
화재, 교통사고, 납치, 강도, 살인, 그것도 아니면 갑작스레 큰 병에 걸린 상황들을 상상해봤다. 이 중에 무엇도 나한테 일어나지 않을 게 확실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불안해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불행에 뒤통수 맞고 싶지 않았다.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하며 사는 평범한 일상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와 내 인생을 흔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뭐랄까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고작 불행 따위도 예상하지 못하고 맘 편히 있다가 당하는 꼴이라니.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니가 올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고 당당히 소리치면 불행이 더 당황하겠지? 상상만으로도 통쾌했다.
불행이 언제 올진 알 수 없었다. 사실 올지 안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인가?'싶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엘리베이터가 평소보다 더 큰 소음을 내는 것 같을 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인상이 좋지 않을 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골목길에서 내 것이 아닌 발소리가 들릴 때. 소리를 지를까 눈을 질끈 감을까 아니면 도망을 칠까 고민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불행의 이상한 싸움은 계속됐다. 불행은 나에게 관심 조차 없는데 나 혼자 자꾸만 이기고 싶어 했다. 불행을 견제하는 마음이 최고에 다다랐을 때는 차를 탈 때마다 무서워졌다. 도로 위의 수많은 차들 중 어떤 차가 우리 차랑 부딪칠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에 다른 차들은 나를 향해 날아드는 총알처럼 보였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쓸데없이 비장하게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당신이 나와 저승길을 함께할 사람입니까?' 하는 마음으로. 비상시 대피 요령은 시험을 앞둔 사람처럼 집중해서 들었다.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다들 우왕좌왕하는데 나 혼자만 침착하게 구명복을 꺼내서 탈출 직전에 바람을 넣는 상상을 하면서. 잠시 후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조금 머쓱해지곤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덜컥 겁이 나는 일이 많아졌다. 매일이 덜컥이라 내 심장이 아직도 달려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제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불안하지 않은 삶은 어떤 거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 인터뷰를 보기 훨씬 전부터 불안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선생님들이랑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우리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본 적도 없는 나라들 이름을 입에 올리며 얘기를 하다가 사실 나는 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비행기가 추락할까 봐 겁이 난다고. 내 딴에는 크게 용기 내서 고백한 건데 한 선생님이 장난기와 놀림과 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면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는대요?"
머릿속이 띠용했다. 걱정을 하든 안 하든 사고는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다. 걱정은 불행을 막을 수 없다. 오지도 않은 불행에 미리 겁먹고 가드를 올리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밥 먹을 때 맛있게 밥 먹고 잠잘 때 편안히 잠자며 기쁠 때 소리 내서 웃으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러다 불행이 찾아오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 날 이후로 나의 불안이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불안과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이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불행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깔, 계절 따라 변하는 공기의 냄새, 이름 모를 풀꽃들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