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이가 또 일기를 안 냈다.
"일기 안 썼어?"
"썼어요."
"그럼 안 가져왔어?"
"가져왔어요."
"그럼 지금 내."
"네."
하성이는 가방을 뒤적였다. 지난번과 같은 수법이었다. 지난주에도 10분 동안 가방 속만 들여다보고 있길래 못 찾겠으면 선생님이 찾아주겠다고 했더니 가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해 결국 그냥 넘어가 준 일이 있었다. 일주일도 안 됐는데 같은 수법을 또 쓰는 녀석을 보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방을 만지려고 하자 아이는 또 울기 시작했다. 일단 후퇴하는 척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짜기로 했다. 그날 하루는 하성이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하성이는 1교시 수업 시간 내내 뽀로통한 표정으로 교실 뒷문 앞에 서 있었다. 자리에 앉으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가방을 만지려고 한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거나, 언제라도 선생님이 한눈을 팔면 교실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로 보였다. 서 있는 하성이가 신경 쓰이는지 아이들도 계속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일단 수업을 진행했다. 하성이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이랑 놀더니 2교시가 시작하자 또 뒷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어지간한 똥고집이 아니다. 하성이를 어떻게 책상으로 불러들일까 고민을 하다 가방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는 일부러 하성이 책상 쪽으로 다가가 가방을 만지려는 시늉을 했다. 하성이가 급하게 달려와 가방을 홱 낚아챘다.
"이제 자리에 앉아."
하성이는 가방을 지키기 위해서 자리에 앉았다.
내 말을 들은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하성이는 계속 책상을 쿵쿵 치며 수업을 방해하려 들었다. 다행히 조작 활동이 중심이 되는 수업이라 아이들에게 활동할 시간을 주고 하성이에게 다가갔다.
"선생님이랑 같이 해 볼까?"
같이 하자는 말 한마디에 하성이는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세웠던 가시를 잠시 내려놓았다.
손으로는 활동을 하면서 하성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아까 선생님이 가방 만지려고 했을 때 왜 울었어?"
"..."
"눈물은 슬플 때 나는 거잖아. 슬펐어?"
"네."
"선생님이 가방을 만지는 게 왜 슬퍼?"
"저는 그게 슬퍼요."
"그래?"
하성이의 태도는 1) 나랑 대화하기 싫거나 2) 속마음을 들키기 싫은 것처럼 보였으나 3) 진짜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황에 따른 감정과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친구들이 하성이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봐. 그때는 기분이 어떨까?"
"좋아요."
어라? 이 녀석 봐라? 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나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하성이는 누가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구나. 선생님이 자주 괴롭혀줘야겠네."
나는 하성이의 목을 간지럽히는 시늉을 했다. 하성이는 상상만 해도 간지럽다는 듯 몸을 피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3교시는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 시간에는 아이들이 영어교실로 이동해서 수업하기 때문에 내가 하성이의 가방을 몰래 훔쳐보고 가방의 비밀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하성이의 가방을 열었다. 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경계를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방 안은 아주 평범했다. 놀랍게도 일기를 썼다는 말도, 일기장을 가져왔다는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 잠시나마 하성이를 의심한 게 미안해졌다. 일기 내용도 특별할 게 없었다. 평범한 하루를 연필로 꾹꾹 정성 들여 쓴 성실한 일기였다. 하성이는 왜 이 일기를 나에게 보여주기 싫어했을까?
하성이는 아주 복잡한 미로 같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아이. 하지만 끊임없이 관심받고 싶어서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 선생님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도망가겠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 아이. 그 협박의 밑바닥에는 진심으로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날 이후 하성이에게 아주 조심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다가갔다. 복잡한 미로를 헤매고 헤매다 보면 그 아이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가끔 간지럽히지 않아도 웃어줄 때나, 묻지도 않았는데 형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잘하고 있어.> <그 길로 쭉 오면 돼.> 같은 이정표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래서 하성이라는 미로를 풀었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겠다. 어떤 날은 목적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날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끝까지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해마다 20명 남짓한 아이들을 만난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만, 하성이처럼 선생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도 꼭 한 두명씩 있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면 흔히들 그런 아이들은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일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편견일 뿐이다. 우선 '결손가정'이라는 단어부터 문제가 있다. '결손'이라는 낱말은 어느 부분이 없거나 잘못되어서 불완전하다는 뜻인데, 부모 중 한쪽이 없는 한부모 가정도 있고 부모가 모두 없어 조부모가 키우는 조손 가정도 있지만 어떤 가정도 감히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가족구성원의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사정이야 다 다르지만 하성이 같은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안쓰럽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내가 교사라서 참 다행이라는 것이다. 안쓰러운 아이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사라서 적어도 1년 동안은 그 아이에게 매일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 그것이 그 아이를 단숨에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면 잠시나마 안심이 된다.
올해도 하성이만큼이나 복잡한 미로 같은 아이를 만났다. 이런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오은영 박사님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오은영 박사님이라면 미로 같은 아이들도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낼텐데 나는 잘못된 길로 들어갔다가 돌아나오기도 하고 막막함에 멈추기도 한다.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화분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미로를 풀 것. 물을 주자마자 싹이 날 거라고 기대하지 말 것. 꽃이 피지 않는다고 물주기를 포기하지 말 것. 언젠가는 세상에 하나 뿐인 아주 멋진 꽃이 필 거라고 믿고 끝까지 정성껏 물을 줄 것.
아이들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름은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조금 더 완벽한 보호를 위해 정확한 대사나 상황, 성별 등도 그때그때 조금씩 바꿔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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