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됐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설날이 그립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됐다. 우리 할아버지는 1914년생이다. 10년 전, 97살이셨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잠드셨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나랑 72살 차이 띠동갑이었던 할아버지는 내가 10살일 때 82살이셨다. 할아버지의 외모는 어린 내가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늙어있었고 할아버지의 말은 늘 알아듣기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나를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이웃 마을에 살았다는 사냥꾼 이야기나 낙지를 먹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도무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웅얼웅얼하시면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될지 몰라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보면 할머니가 어디선가 나타나 할아버지한테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썩을 놈의 영감탱이가 애 데려다 놓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며. 그러고는 나한테 나가서 놀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말 중에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들도 있다.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뻐꾸기시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제 늙어서 시계 보기가 힘드니 뻐꾸기가 몇 신지 알려주면 좋겠다고. 할아버지는 7남매를 낳으셨다. 7남매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애들을 낳았고 그 애들 중에도 나이가 많은 애들은 결혼을 해서 애들을 낳았다. 워낙에 가족이 많다 보니 명절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할아버지가 앉아계시거나 누워계시던 작은 방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왔다는 인사, 식사하시라는 말, 간다는 인사들이 쉼 없이 오갔지만 정작 그 방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작은 방 안에서 뻐꾸기시계를 가지고 싶던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단지 시간을 알 수 없어 불편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래 머무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7남매 중 6번째 아들의 첫째 딸이다. 할아버지에게는 이미 나 말고도 많은 자식들과 손자들이 있었기에 나의 탄생이나 존재가 특별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나에게 가끔 커다란 관심을 보이셨다. 어느 날은 나에게 무슨 띠냐고 물어보셨다. 호랑이띠라는 내 대답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이내 눈을 뜨시더니 말띠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고 하셨다. 머릿속으로 말띠 남자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8살 연상이거나 4살 연하여야 했다. 어느 쪽도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4살 연하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는 했다. 왜 말띠여야 하냐고 물어봤다. 말띠가 말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어줄 거라고 하셨다. 그게 내가 호랑이띠인 거랑은 무슨 상관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 뒤로 말띠 남자랑 연애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말띠 남자랑 결혼을 했으면 정말 돈을 많이 벌었을까.
스무 살 때는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했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대학에 왜 떨어진 건지 물어보셨다. 물어보시니 대답은 해드려야겠는데 나도 내가 왜 떨어진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90이 넘은 할아버지는 점점 기억력이 흐려지고 사람을 못 알아보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많은 자식, 손자, 증손자 중에서도 나는 또렷이 알아보셨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나만 보면 물어보셨다.
"그란디.. 대학은 왜 떨어져브렀어?"
할아버지는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큰 관심이 있으셨나 보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늘 나의 대학을 걱정해주던 분이셨다.
설날이 되면 할아버지는 그 작은 방에서 나오셔서 자식들과 손자들의 세배를 받으셨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이 순으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목청 높여 세배를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빳빳한 새 지폐 뭉치를 꺼내셨다. 지폐는 만 원권, 오천 원권, 천 원권이 순서대로 잘 포개져있었다. 큰 오빠부터 차례대로 세뱃돈을 받았다. 만 원권을 두세 장씩 주시기도 하고 한 장씩 주시기도 하다가 만 원권이 다 떨어지면 오천 원을 주시고 오천 원권도 떨어지면 천 원을 주시고 하는 식이었다. 가끔씩 우리는 눈짓으로 싸인을 교환했다. 싸인을 받은 한 명이 세뱃돈을 받고 제일 뒤에 가서 다시 줄을 섰다. 보는 사람도 줄을 선 사람도 벌써 웃겨서 키득키득 웃었지만 할아버지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막내 다음에 갑자기 키 큰 누군가가 서 있어도 의심하지 않고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또 돈을 내미셨다. 그 순간 모두가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참아왔던 웃음을 터트리면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하셨다. 상황 파악이 되면 기분 좋게 웃으셨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다시 설날이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설날도 벌써 여러 해 보냈다. 늘 할아버지의 작은 방 문을 열고서는 왔다는 인사, 식사하시라는 말, 간다는 인사만 하고 금방 나왔던 나였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그립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그 시절의 설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