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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촉 Oct 25. 2024

당신의 친절 점수는 81점입니다.

죽고 싶지만 카드값이 있기에

당신의 친절 점수는 81점입니다.

   처음 공무원이 되고 받은 임용장에 따라 부서를 배치받고 내가 처음으로 맡았던 일은 전화 민원 상담이었다. 그것도 그냥 민원이 아니라 구청 민원 총량 중 매년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주차 부서의 민원이었다. 임용장을 받고 처음 출근한 다음날부터 바로 전화 민원 업무에 투입되었다. 살면서 관공서에 전화를 몇 번이나 해 보았는가? 나는 그때까지 단 한통의 전화도 해본 적이 없었다.(물론 지금도 열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들에게는 각각의 사정과 각종 사연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부서의 민원을 ‘생고기 민원’ 또는 ‘날고기 민원’이라고 부르는데, 부서에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당장의 단속이나 과태료로 인해 분노한 상태에서 무작정 정제되지 않은 상태의 말들을 쏟아냈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상담을 하는 것이 내가 처음 맡은 나의 주요 업무였다. 종로는 관광지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근무지이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거주지이기도 하다. 이곳을 경험하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여기에서 단속된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사연이 있었다. 사람들은 주로 나의 이름을 묻고, 분노를 표출하며 조국과 민족을 찾거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런 식이었다.


  "내가 아가씨한테 하는 말은 아닌데~ 세상이 그렇다는 거야 세상이."
   "근데 아가씨 차는 있나? 차도 없는 게 뭘 안다고."


   애석하게도 출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던 당시의 내가 알던 도로교통법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나는 그들이 비꼬듯 ‘차도 없는 아가씨’였기 때문에 당연히 주차 단속에 걸려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행정법 과목에서 질서위반행위규제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지만 시험에 나오는 것은 판례 위주이거나 개괄적인 내용이었으므로 개별 과태료 전화 상담 실무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당장 하루에 적게는 50통에서 많은 날은 100통이 넘는 전화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허겁지겁 국가법률정보센터에서 온갖 도로교통과 과태료와 관련된 법들을 찾아 읽고, 프린트해서 붙여놓기도 하며 ‘선생님이 왜 과태료를 내셔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걸려오는 수십 통의 전화를 갓 임용된 경험 없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정적으로 걸어오는 전화 민원을 상담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매뉴얼에는 욕설을 들으면 더 이상 상담이 어렵다고 통지하고 끊을 수 있다 했지만 막상 듣고 나면 얼굴이 덜덜 떨려서 그럴 수 없었고, 행여 통지를 하더라도 또 전화가 걸려 왔다. 길게 물고 늘어지는 통화에는 다른 민원을 핑계로 상담을 종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러기에 신규였던 나는 너무 노하우가 없었다. 업무를 맡은 지 3일 만에 현타가 왔다. 그리고 한 달쯤 뒤부터 사무실 전화 벨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은 친절해야 하기 때문에, 감사 부서에서 직원 전화 친절도 점검이라는 것을 했다. 신규였던 나도 점검 대상이었다. 평상시의 민원 내용과는 다른 것을 물어오는 전화를 받고 나서 며칠 뒤에 나의 친절 점수가 공문으로 통보되었다. 81점이었다. 기본이 90점대로 평가되는 점검에서 85점 이하는 부서장 교육 및 재점검 대상이었다. 전화를 받은 내가 인삿말과 소속만을 밝히고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과, 통화를 종료하기 전에 더 궁금하신 점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름을 알려주면 내 이름을 부르며 찾는 전화가 늘어났고, 나는 그것이 두려웠으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모든 이들에게 굳이 더 궁금하신 점을 묻고 싶지 않았다. 재점검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전화를 받을 때 소속과 함께 이름도 밝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한동안 공무원에게 친절을 이야기하거나 청렴과 친절을 거의 동일시하는 것이 강요처럼 느껴졌다. 말투가 아무리 친절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친절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친절하게 전화를 받으면 무얼 하는가. 나의 결론은 늘 하나였다.


   "그래도 과태료는 내셔야 합니다."



외나무다리에 선 나날들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는 채용의 기본 경쟁률이 100:1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험 과목의 전체 문제들 중에서 틀린 문제를 한 손에 꼽을 정도가 된 후에야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시대의 흐름을 잘못 탄 것 같기는 한데, 대학시절부터 한창 공무원 바람이 불었고 입학할 때부터 막연히 공무원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학교를 다니는 내내 다른 동기들이 열을 올리던 그 시절의 ‘스펙 쌓기’를 하지 못했다. 흔한 어학연수나 토익시험도 보지 않은 채였고, 졸업할 즈음이 되니 공무원 바람은 열풍이 되어 경쟁률이 하늘을 뚫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시험을 봐서 들어왔건만 처음 맡은 업무가 '욕받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오랜 기간 공무원만 생각하고 달려온 시간들이 쌓인 것에 비해,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현실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공무원에게는 어떤 일이든 주어질 수 있고 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사 당시에는 이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는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공무원이 되면 세상을 바꾸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굉장히 멋질 것이라 막연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내가 입사해서 마주한 공무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생고기 민원인들을 상대하는 업무로도 이미 힘들었지만,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나이 많고 경력 많은 팀원들이 저희들 하기 싫은 일을 떠맡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팀원 모두가 똑같이 과태료 상담 전화를 받아야 하는 팀에서 일하면서, 앞에서 받지 않는 민원 전화는 결국 막내인 내 전화로 넘어오기 일쑤였다. 하루는 선거 업무에 차출되어 선거 사무원으로 근무하느라 사무실을 비웠던 적이 있었는데, 전화 연결이 느려서 화가 났다는 민원에 대해 그날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팀원이 사무실에 있지도 않았던 나에게 사과 답변을 하라고 시켰다.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하지? '아이고 선생님, 제가 그날 놀려고 휴가를 쓴 것도 아니고 아무도 안 한다는 선거 사무원으로 끌려 나가느라 사무실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날 근무하던 팀원이 아니라 제가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선생님 전화를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한참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답변은 매우 공손하고 정상적이며 공무원스럽게 잘 써서 해결했지만, 근무하면서 묘하게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고, 애초에 신규였던 내가 그 팀에 배치된 것부터가 누군가가 하기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대부터가 너무 다르고 경력도 너무 다른 팀원들과 한 팀으로 근무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컥 사직서를 낼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랜 기간 공무원을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다른 일을 할 자신 또한 없었다. 그리고 나에겐 취업을 했다는 기쁨과 함께 긁어서 쌓아 놓은 카드값이 있었다. 특별히 빠져나갈 다른 길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로는 민원인, 내부에서는 팀원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며 전화 벨소리 환청이 들리는 수준에 이르니 문득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에 종종 나오는 자살한 공무원의 이야기가 남일 같지 않았고, 그가 몇 층에서 투신했다는 기사를 보며 내가 근무하던 5층에서 뛰어내리면 죽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정상적인 마음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전문가 상담이었다. 가족 중에 공무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기업을 다니는 친구들은 공무원 조직에 대해서는 완전히 남이었으므로 공무원 조직 특유의 묘하게 불합리한 상황을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없이 불안정하고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에서 나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신경정신과 등의 병원 상담은 물론이고 심리상담이나 마음상담과 같은 센터 상담을 받는 것도 특이하게 보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힘들다고 느꼈을 때 바로 찾아가지 못하고 한동안 혼자서 끙끙 앓으며 지냈다. 그러다 그즈음의 교보문고 1위를 했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작가가 자신의 병원 상담 내용을 담백하게 적어 내려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몰랐음에도 책에 관심이 생겼던 이유는 정말 단순하게도 제목에 ‘죽고 싶지만’이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는데, 책을 통해 실제로 전문가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간접적으로 읽어볼 수 있었고, 상담센터에 대한 편견이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책이 나에게까지 닿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백세희 작가님과 출판사 흔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사람 하나 살리셨어요!)

   법정의무적으로 혹은 명목상 존재하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구청에 직원을 대상으로 심리 상담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상담센터의 1회 상담 비용은 대략 10만 원 정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이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담받으러 다니는 직원이라는 소문이 날까 무섭기도 했다. 또 한 번 고민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으로 상담을 신청했다. 아직까지도 소문이 돌아온 것은 들어보지 못한 바, 담당 직원이 고맙게도 비밀을 지켜준 것 같다. 처음 직접 경험한 심리 상담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내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왜 힘든지에 대해 선생님과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다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가족이나 회사 동료나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처음 보는 선생님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같은 조직 내부의 사람이 아닌 철저한 제3자이면서도 상담 심리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선생님과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와 잘 맞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은 기본이고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나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상담 선생님과의 시간들은 나의 ‘어쩌다 보니’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직장생활이 힘들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만난 선생님과는 지금도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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