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며드는 거리

by 볼통통알파카

문득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면, 아기가 옆에서 층수를 따라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일 층, 이 층…”

아직 그 장면은 현실이 아니지만, 머릿속에서는 선명하게 재생된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와 아무 관련 없는 어느 날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아빠!” 하고 부르던, 맑고 따뜻한 목소리.

이제 우리는 함께한 시간이 1만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 안에는 기저귀를 갈던 손길부터, 작은 손을 꼭 잡고 걸음을 떼던 순간,

그리고 넘어져 울던 아이를 안아 달래던 기억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의 손가락은 참 작았다.

꼬물거리던 그 손가락이 이제는 곧게 뻗어 무언가를 가리키고,

이어폰만 하던 발바닥은 힘차게 땅을 박차며 달린다.

이렇게 자라는 속도를 곁에서 지켜보는 건 묘하다.

순식간에 커버린 것 같으면서도, 그 사이사이의 작은 변화를 전부 기억한다.

사실 육아는 늘 ‘행복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매일 붙어 지내던 시기에는 숨이 막히기도 했다.

누군가는 “아빠가 육아에 이렇게 참여하다니 대단하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서는 ‘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자기검열이 계속됐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 날카로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면, 그 모든 의문이 사라진다.

피곤함, 짜증, 계획… 다 사소해진다.

그 웃음은 마치 ‘이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나는 가끔 미래를 상상한다.

아이가 갑자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거리를 둘 것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와 그랬듯이.

이 생각이 스칠 때면, 지금의 하루가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침에 아이가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모습조차 놓치고 싶지 않다.

애착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는 그 표정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의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나이에, 남자가, 그렇게 오래 집에 있으면 나중에 일할 때 적응하기 힘들지 않아?”

“아이 돌보는 건 좋지만, 본인 미래는 생각해?”

이런 말들은 여전히 나를 흔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누군가의 시선이 나의 선택을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건 이 시간이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시간,

내 손을 잡고 첫 계단을 오르던 시간,

그리고 언젠가 그 손을 놓아줄 준비를 하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여전히 내일을 걱정하며 산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도 하나씩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언젠가는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놀 궁리를 한다.

아이의 웃음을 오래, 아주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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