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10화

믿을 구석

by 김커피

내게 믿을 구석이란 할아버지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나와 다른 마음인 듯했지만 그건 진짜 할아버지의 모습을 못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텔레비전 구경을 할 정도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감성적 한량이라 놀고먹으면서 관심을 둔 것이 하필 영화였는데, 좋아만 했으면 될 것을 제작에 재산을 쏟아부었고 열정만 넘쳤을 뿐 제작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청년의 영화는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었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돈 많은 할아버지께 시집갔던 할머니의 고생길은 그때부터 열렸다. 살림도 살아야 하고 자식들도 키워야 해서 온갖 일을 다하고 다녔지만 한량으로 살아온 할아버지는 정신 차릴 줄을 모르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주사라고 하기엔 과격한 행패를 부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맡겨진 이후의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에도 술 취한 할아버지와 '또 시작이다.' 혼잣말을 하며 지친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할머니께 직접적인 폭력은 쓰지 않았으나 없는 살림 와중에 있는 것들을 방바닥 여기저기로 던져 깨부수곤 했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보며 예민해진 나는 술에 취한 할아버지의 걸음소리만 들어도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겠구나 혼자 생각할 수 있었고 슬픈 예감은 틀린 적도 없어서 매번 우당탕탕 시끄럽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일상이 흘러갔다. 일찍 일어난 할머니는 신발공장에 일을 하러 나가셨고, 할아버지는 나와 집안일을 담당하셨다. 시끄럽다가 무난하다가의 반복이었다.



무난한 일상 속의 할아버지는 내게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는 것이 워낙 많은 분이라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이야기보따리는 아끼지 않고 손녀딸에게 몽땅 털어주시곤 했다.


어릴 적부터 글 쓰는 재주가 좋아서 대회에 나가면 상도 받아오는 나를 대견스러워하셨다. 어떤 날엔 이 대회 저 대회 상이 합하여 하루에 3개의 상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그런 날에는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보름달처럼 밝았다. 내가 쓴 글은 항상 할아버지께 먼저 보여드렸고 읽은 후 글에 대해 피드백도 빼먹지 않고 해 주셨다. 그런 날이 많아질수록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시끄러운 날은 줄어들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머리의 반쯤을 채웠을 때야 일을 하기 시작한 할아버지도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 수밖에 없던 상태로, 그러니까 재산과 열정을 동시에 잃은 충격을 안고 살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변한다던가.

남들은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어서야 어렵사리 아파트 경비 일자리를 구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나를 오래도록 슬프게 했다.



할아버지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고 당신의 자식들은 그런 환경으로 드러난 단점들만 골라서 쏙 빼닮아있었는데 그 점은 나와 동생을 내내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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