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커다란 고래가 찍힌 심해 사진을 보고 엉엉 운 적이 있었다. 아찔할 정도로 어두운 바닷속을 유유히 흘러가는 고래의 모습은 기껏해야 증명사진 사이즈로 책에 실려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찌르는 커다란 압도감에 휩쓸려 눈물을 멈추지 못했더랬다. 책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가 작고 짧은 검지로 그 사진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절대 이곳에 가지 말라고, 여기 이 고래랑 같이 가지 말라고 엉뚱한 말을 하며 울었다. 왜 울었는지, 그때 대체 무슨 마음이 들었던 건지, 그 고래가 엄마를 당장에라도 등에 태우고 날아갈 것 같았는지, 그래서 엄마가 고래와 함께 떠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확신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은 커서야 조금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는 마음과 비슷했다. 내가 다 잘못한 것 같은 마음.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 그러니 작은 마음에 그 커다란 책을 들고 펄럭이며 엄마에게 달려갔던 것이었을 테다. 당시 엄마는 내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의 사진이 대체 뭐가 슬펐던 걸까. 아마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워 울었을지도 모른다. 눈물이라는 것은 기쁠 때 날 수도 있고, 슬플 때 흐를 수도 있고, 심지어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도 멈추지 못하게 마련이니까. 고래가 바다를 유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린 나는 그때 '고래가 바닥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아서' 두려운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아직 다양한 생물을 접하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발을 딛고 있지 않는다, 라는 것은 나에게 꽤 많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안겨줬다. 두 발 자전거를 막 시작하였을 때나,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이동수단에 올라탈 때도 난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나의 악몽은 무조건 창공에서 시작했다. 붕 떠 있거나, 아니면 점점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이다. 아무리 발을 쭉 뻗고, 안간힘을 써봐도 나는 땅과 점점 멀어지고, 붙잡을 것 하나 없이 건물 위를 날아다닌다. 건물 위만 날아다니면 그나마 스릴을 즐겨보련만, 나는 건물 위가 아니라 구름 위까지, 그리고 지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적막한 우주까지 날아간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악몽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귀가 젖도록 운다. 잠에서 깨고 나선 생각 한다.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이야'라고.
나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자주 안겨주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몰라도 적어도 잘 풀 줄은 알아야 할 텐데, 나는 그것조차도 하지 못한 채 차근차근 스트레스 산을 쌓는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여 나와 땅을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일까. 이러한 악몽과 마음의 허함을 동시에 느끼며 불안해하는 것일까.
걷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악몽을 너무나 많이, 반복적으로 꿀 때 즈음이었다. 나는 자기 전, 두 시간 정도 열심히 집 앞과 집 주변 혹은 집 근처에 있는 연못을 걸었다. 크기가 큰 연못은 두 바퀴 정도를 돌면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집까지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하면 꼬박 두 시간을 걷는 셈이었다. 나는 발에 힘을 주고 걷곤 했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도는 마음이 달랐다. 연못으로 향할 때와 다시 돌아올 때의 마음이 달랐다. 발걸음마다 튀어 오르거나 밝히는 생각이 연못 주변에 잔뜩 쌓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배출했고, 걷느라 축 늘어지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무겁게 가라앉곤 했다. 그런 날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붕 뜨지 않을 수 있었다.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걷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차원적으로는 내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다음의 이유는 걸음으로 인하여 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걸으며, 나는 나와 대화한다. 대화의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고, 가끔은 지겹도록 같다. 우리는 사는 내내 지겹도록 무언가를 하며 끊임없이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는 것이 좋다. 이제 나는 고래가 걸을 수 없음을 안다. 아니, 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고래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걸음으로 인해, 알 수 있던 어떤 것. 남들은 쓸데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러한 것을 통해 몸의 무게를 채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