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지만, 계속 걸어간다
(커버: Unsplash의Nile Pereira)
3화에서 썼듯 2025년 2월 《전후 공산당의 배신》이 출간됐고 펍헙번역그룹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제 정말로 전문 번역가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나의 것》도 곧 출간될 예정이었고, 펍헙번역그룹에 들어갔으니 번역 일감도 들어올 것 같았다. 설렘과 기대가 컸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펍헙번역그룹에 입학했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입학했다고 해서 바로 번역 일감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신입 회원에게는 일감이 거의 없었다.
펍헙번역그룹의 시스템은 다른 번역가 에이전시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능동적으로 책을 고를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좋았지만, 단점도 함께 따라왔다.
다른 번역가 에이전시의 경우 출판사가 판권 계약을 할지 말지 결정할 책을 놓고 검토서를 쓴다고 알고 있다. 당연히 출판사는 이미 그 책에 상당히 관심이 있는 상황이고, 검토서를 쓰면 계약이 불발되더라도 소정의 검토비를 받는다. 판권 계약을 할지 말지 결정에 도움을 줘야 하므로, 기획서와 마찬가지로 길고 상세하게 써야 한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반면 펍헙의 검토서는 저작권 에이전시들이 보내는 뉴스레터와 거의 같은 방식이다. 외국 출판사의 카탈로그(라이츠 가이드Rights Guide)를 보고 출간 예정이거나 이제 막 출간된 책 중에서 번역가들이 관심 있는 책을 선택해서 A4 두세 장 정도로 짧게 검토서를 쓴다. 그렇게 모인 검토서 여덟 편을 매주 출판사들에 위클리 뉴스레터로 보낸다고 알고 있다. 출판사가 그 책의 존재를 처음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실제로 판권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당연히 많지 않다. 검토비 같은 것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펍헙번역그룹은 ‘펍헙 에이전시’라는 저작권 에이전시를 같이 운영하고 있고, 그 에이전시를 통해 계약한 책은 가급적 펍헙번역그룹 내에서 그 검토서를 쓴 번역가에게 맡기는 원칙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펍헙에서도 다른 번역가 에이전시처럼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그 책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쓰는 ‘상세 검토서’를 쓰기도 한다.)
나도 2025년 올해 검토서를 스무 편 가까이 썼지만, 올 한 해 동안 펍헙을 통해 번역 계약으로 이어진 책은 없었다. (물론 내가 관심 있는 책이 대개 ‘시장성’이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하지만.)
펍헙에서 일감이 없으니, 2024년처럼 직접 기획서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2025년에는 2024년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냈다. 관심 있는 책을 찾아서 읽고, 기획서를 쓰고, 출판사를 알아내서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3화에서 이미 말했듯이, 번역 계약으로 이어진 건 없었다.
2024년 《영국은 나의 것》 계약은 정말로 ‘초심자의 행운’이었던 것이다. 그 행운을 다시 만들려고 해도,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출판사는 답장조차 보내지 않았고, 답장을 보낸 출판사도 정중한 거절이었다.
기획서를 쓰는 건 시간도 많이 들고 에너지도 많이 드는 일이다.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고, 왜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필요한지,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지, 비슷한 책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의 강점은 무엇인지 등을 설득력 있게 써야 한다. 그렇게 공들여 쓴 기획서가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상상하는 과정은 여전히 즐거웠다. 번역 계약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그 책을 읽고 고민한 시간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번역 출판 기획서를 닫으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올리고 있다. 출판사에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기획서들을 정리하면서 왜 이 책을 번역하고 싶었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등을 담아보고 싶었다. 그냥 휴지통으로 들어가기에는 아까웠으니까. 그렇게라도 올려놓으면, 적어도 그 기획서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도 계속 기획서를 쓸 것이다. 언젠가는 또 행운이 따라줄 거라고 믿으면서.
2025년, 나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세 개의 강의를 더 들었다. 엄민용 선생님(스포츠경향 편집국장)의 교열 강의, 홍순철 선생님(BC에이전시 대표)의 외서 기획 및 저작권 수출입 강의, 신재일 선생님(H번역가그룹 운영)의 번역 기획서 쓰는 법 강의였다.
원주에서 어떻게 왔다 갔다 했나 싶다. 그나마 2024년 강주헌 선생님 강의는 금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났지만, 이 세 강의는 평일 저녁 7시 반에 시작해서 9시 반에 끝났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 기차 막차를 타려면 헐레벌떡 뛰어야 했고, 그나마도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은 늘 피곤했다.
그래도 힘들어도 강의를 들은 까닭은, 나 스스로 노력을 여러 가지 해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번역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출판 시장을 이해하는 시야도 넓은 번역가가 되는 것이 전문 번역가로 자리 잡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홍순철 선생님의 강의는 출판사 편집자나 1인 출판사 대표들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번역가 지망생으로서는 잘 모르는 출판계의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 신재일 선생님은 강의 외에도 내가 쓴 기획서를 직접 살펴보고 피드백을 주셔서 크게 도움이 됐다. 엄민용 선생님의 교열 강의는 번역에 직접 관련된 건 아니었지만, 글을 살피고 다듬는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
2025년 11월, 《영국은 나의 것》이 출간됐다. 2024년 9월부터 번역을 시작해서 2025년 2월에 원고를 넘겼으니, 출간까지는 약 8개월이 걸린 셈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 세상에 나온다는 건 여전히 신기하고 뿌듯한 일이었다. 서점에 가서 내 책을 찾아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온라인 서점에 내 이름이 번역자로 올라가 있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두 권이다. 전문 번역가로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10권 정도는 출간해야 한다고들 했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2025년은 출판계가 특히 힘든 한 해였던 것 같다. 물론 출판이 쉬운 적은 없지만, 올해는 구체적인 숫자로도 정말 바닥을 모르고 어려웠다고 들었다. 특히 외서는 판권도 사 와야 하고 번역가에게 번역료도 한꺼번에 줘야 하니까,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출판사들이 더 꺼리는 것 같았다. 내게 올해 일감이 없었던 것도 그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24년 초, 전문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 조만간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번역만 하며 살겠다고.
하지만 2025년을 보내며 그 생각은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뀌었다기보다는 명확해졌다. 처음에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려는 방편으로 전문 번역가가 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2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면서, 설령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전문 번역가는 꼭 되고 싶어졌다. 여러 권의 역서를 낸 출판 번역가가 되고 싶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출판 번역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번역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려면, 일이 잘 풀리더라도 아마 5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처음에는 이게 좌절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것도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전문 번역가로 자리 잡는 건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었다. 급하게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 천천히라도 꾸준히 달리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5년 후 상황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2025년 12월, 나는 출간된 번역서 두 권이 있다. 《전후 공산당의 배신》과 《영국은 나의 것》. 펍헙번역그룹 회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 한 해 새로운 번역 계약은 없었다.
쉽지 않다. 기획서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검토서를 써도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전문 번역가로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한참 더 걸릴 것 같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계속 기획서를 쓰고, 검토서를 쓴다.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
2015년 부산에서 서울까지 왕복 10시간을 오가며 번역을 배우기 시작한 그 첫걸음부터, 2016년부터 2023년까지 8년간 단체에서 기사와 논문을 번역하며 밑바탕을 쌓은 시간, 2024년 전문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첫 계약을 따낸 그 순간, 그리고 2025년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그래도 계속 걸어가기로 다짐한 지금까지. 이 모든 시간이 10년이다.
아직 걸을 길이 한참 더 남았다. 하지만 이미 10년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10년 만에 번역가’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시작했는데, 시리즈를 완성한 지금 다시 보니 좀 민망하고 겸연쩍다.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전문 번역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된’ 건 아니니까. 출간된 책 두 권, 펍헙번역그룹 회원이라는 타이틀. 이게 전부다. 올해 새로운 계약은 없었고, 일이 잘 풀리더라도 앞으로 5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솔직히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출판 번역은 어렵다. 하고 싶어 하고, 재밌어하며, 어느 정도 잘한다고 해서, 그걸로 먹고산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 역시 계속 고민하고 있다. 정말 계속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같은 직업을 꿈꾸는 이들보다는 나은 게 아닐까.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애매한 재능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번역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처럼 떼돈을 벌 일은 없어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분명히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나이가 들더라도 실력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 나은 번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계속하고 있다.
번역가로 살아남는 법에 관한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김고명 선생님의 브런치북 ‘안녕하세요 망할 직업 1위입니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제 막 시작한 나와 달리, 18년 경력의 베테랑 번역가이신 김고명 선생님의 경험과 조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계속 걸어간다. 꾸준히 걸어가면, 언젠가는 도착한다고 믿으면서.
(업데이트: 이 글을 미리 써놓고 발행을 준비하던 12월 19일, 새로운 번역 계약 한 건이 성사됐다.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믿음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10년 만에 번역가’ 시리즈는 시리즈는 4화로 일단 마무리한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 전문 번역가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일이 생긴다면, 비정기적으로나마 글을 쓰고 싶다. 예를 들어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번역 계약을 하게 된다거나,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거나, 혹은 또 다른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거나. 그런 순간들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전문 번역가로 가는 길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나는 계속 걸어가고 있다. 그 과정을 함께 지켜봐 주신다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