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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Oct 23. 2020

나는 (좋은) 엄마(이고 싶)다

엄마도 잘 몰라


나는 엄마다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 여성, 중년, 엄마, 학생 중에서 항상 '엄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내가 여성인지는 50년이 되었고, 엄마가 된지는 20년이 되었다. 그런데 왜 '엄마'가 먼저일까?

아마도 내가 신경 쓰는 가장 많은 부분이 아이여서인 것 같다. 일을 하다가 백수인 요즘, 격주로 원격수업을 하는 딸 점심 메뉴 고민하고, 수업시간 챙기고, 힘든 공부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 일상이다. 하루 스케줄을 그렇게 크게 세워놓고, 그 사이사이로 책 읽고 글 쓰고 멍 때린다.

아마도 엄마가 된 때를 전후로  삶이 가장 많이 바뀌여서인 것 같다. 전에는 내가 어떻게 살지만 고민하면 되었는데, 엄마가 된 이후에는 나 말고 또 하나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자신이 없다

조금 아니 많이 버겁다. 나도 잘 사는 방법을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 그것도 사랑하는 아이의 삶을 내가 어떻게 정해야 할지 영 자신이 없다. 아이가 알아서 척척 정했으면 좋으련만, 나도 매일 헷갈리는 삶의 방향을 아이라고 알겠나?  정해야 할 것은 어디 한두 가지인지. 지금 당장 닥친 진로,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제법 심각한 주제이지만, 나도 쉬려고 누웠는데 후드티를 검은색으로 할지 파란색으로 할지 묻거나, 떡볶이를 어떤 맛으로 시킬지를 결정해 달라고 하면 나도 짜증이 난다. 결국은 내가 답을 줘도, 검은색은 너무 많다느니, 떡볶이가 어느 정도 매워야 한다느니 할 거면서. '물어는 왜 봐?'라고 말하려다가, 사춘기 딸에게 그것은 선전포고이므로 조용히 말을 삼킨다.


나는 딸이 물어오는 질문에, '너는 뭐가 좋은데?'라고 되물어본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 이기도 하고, 본인이 결정하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도 결정이 어려울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그것은 참고일 뿐, 결국 최종 결정의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딸도 그것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본인이 결정을 내리고 문제 해결을 하는 데 익숙하다. 특히 딸은 독립적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해결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이걸 해야 하는데 엄마는 이 중에서 2번만 해줘, 나머지는 내가 할게.' 본인이 해결 과정을 정하고, 그중에 엄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을 나에게 통고해 주는 방식이다. 그것보다 더 도와주려고 했다가는 화를 낸다. 보아하니 엄마가 해결을 해 줄 형편은 안되고, 나름 살아야 하니 생존 방식으로 터득했을 테지만, 나는 그렇게 커 준 딸이 뭉클하면서 대견하다.


대번에 완벽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어른인 나도 매번 실패하고 가끔 성공한다.  아이가 실패할까 봐 엄마가 선택을 대신 해 주지는 않으려고 한다. 일단 내가 자신이 없고, 아이에게 실패건 성공이건 온전한 자신의 삶을 가져가게 하고 싶어서이다.

결국은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딸의 인생이다.


나는 불안하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가슴이 철렁하다. 전직이 간호사인 게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병원에 가서 호들갑을 떨려면 철저히 간호사였던 과거를 숨겨야 한다.  가벼운 병이어도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합병증이 다 생각나고, 그게 안 생기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며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 미리부터 마음을 졸인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집중이 안돼' 딸이 불평을 하길래,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라고 말했다가 딸의 심기를 더 건드려 버렸다.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공부를 안 할까 봐 나는 그것만 걱정했던 거다. '시험 성적 안 나와도 괜찮아', '공부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말하지만, 나는 애써 감추고 있을 뿐, 그래도 시험 성적이 잘 나와서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 엄마이다. 성적이 떨어지면 불안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안 할까 봐 그게 불안하고, 엄마가 '그래도 공부해야지'라고 말해야 아이가 잘될 것 같고.

아이를 믿지 못해서이다. 내가 보아 온 딸은 문제 해결 능력이 정말 뛰어난 아이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내리라 믿으면서도, 나는 학교 성적에 연연한다.


주위에서 좋은 대학 나오고도 일처리는 미숙하면서 인간관계는 빵점인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 점을 비춰본다면, 딸은 웬만한 어른보다 낫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사회에서 그래도 좋은 학교가 좋은 삶을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좋은 삶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남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거라면, 딸은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믿어 주기. 간단해 보이지만 세상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게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할 말이기도 하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아이를 통해서 해결하지 않아 보기로 결심해 본다.

아이는 잘 해낼 거다. 불안한 사람은 나이다.

엄마도 잘 몰라

아이가 헷갈릴 때마다, 단호하게 '이게 더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아이의 모든 질문에 척척 대답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내가 유능한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커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에 대한 조바심 밑에 깔려 있는 내 불안을 먼저 바라보기를.

내 불안보다 아이에 대한 신뢰가 더 커지기를.


나 자신이 허점 투성이인데, 어떻게 완벽한 엄마이기를 바랄까?  아이가 물어오는 이유가 엄마가 해답을 알고 있어서라고 생각해서일까? 엄마가 같이 걱정해주는 말투가 듣고 싶어서, 떡볶이의 매운맛은 내가 정한다고 선언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헤매고, 완벽하기는 커녕 매일 실수하는 엄마이다.


오늘은 딸이 뭔가를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해볼까?

'엄마도 잘 몰라, 엄마도 엄마보다 어른이 그때마다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어.'


(그림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클림트 여성의 세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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