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면 됐다
박영감은 양반집 출신이었다. 비록 아버지대에서 몰락했다고 하더라도, 낳고 자란 기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백구두에 중절모를 쓴 채 자전거로 동네를 다니는 게 일상이었던 그에게 유일한 업은 동네 이장이었다. 아내가 억척같이 6남매를 먹여 살리는 와중에도, 그는 자존심 높은 양반이었고 유유자적한 한량이었다.
어릴 적의 어느 날, 외할아버지네 마당엔 닭 일곱 마리와 내가 있었다. 꼬꼬꼭 무리 지어 다니는 닭들을 잡고 싶었나 본데, 아무리 닭대가리라 해도 어린애 손에 잡힐 리가 있나. 나는 결코 꽁지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그게 분했을까. 나는 엄마에게 닭이 먹고 싶다고 칭얼댔다고 한다. 닭과 나와 엄마의 대화를 듣던 그는 조용히 그날 밤 닭 일곱 마리를 모두 잡았다.
술은 멀리해도 담배는 가까이 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억척으로 산 아내보다 그가 먼저 앓아누웠다. 하나 있는 아들의 사정이 어려워 간병은 오로지 딸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그는 먼길을 떠났다. 그 이후 어느 날에 들은 이야기다.
-아부지 다른 딸 부잣집 보면은 하나같이 이쁘던디, 우리 집은 딸이 다섯이래두 며느리 하나보다 못한디 이거 어쩐대유?
-그 정도면 됐지 더 이뻐서 뭣할라 그러냐.
족히 25년은 된 일이니까 아마도 꼬맹이가 닭 쫓던 그 근방의 일일 게다. 잊혔던 지난날도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빈자리를 비로소 실감한 후라면 더욱더.
그는 참으로 담담하게 살다 갔구나. 그래 나도 사랑을 담담히 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