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방송하면, 아나운서는 뭐해? #01]
저는 KBS라는 아주 좋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 미디어 시장을 바다에,
방송국과 각종 미디어를 배에 비유했을 때
KBS는 그 어느 배보다도 크고 튼튼하죠.
국가 기간 방송사로서
시청자의 수신료로 운영됩니다.
시스템과 규모, 인력 운영의 노하우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방대한 아카이브는
KBS의 자랑입니다.
KBS라는 배에 타고 있으면 참 편하고 든든합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KBS라는 배 안에서, 구성원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최고다’
가끔 보게 되는 다른 배들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고,
그들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고 믿는 분들도 아직 많습니다.
적어도 내가 ‘퇴직’ 하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저는 1등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KBS라는 ‘같은 배’에 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3등석 정도지만
그래도 KBS라는 배가 주는 크고 웅장한 편안함을
함께 누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KBS는 하나의 배라서
가끔 기회가 되면 1등석에 올라가서
방송도 하고, 회의도 하면서
내가 KBS 소속이라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기감 따위는 없었습니다.
3등석이어도, KBS라는 배는 참 편안했습니다.
신입사원 때까지는 말이죠.
어떤 파도에도 침몰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KBS 내부에는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퇴직’ 하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편안함이 주는 환경과 혜택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KBS 남자 아나운서 최초로
육아휴직에 들어갔습니다.
육아휴직이 시작됨과 동시에
법인 명의의 휴대폰은 개인 명의로 바뀌었습니다.
KBS를 떠나 있게 된 거죠.
시청자로서 바라본 KBS.
솔직히 말해서 저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KBS 프로그램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모니터나 의무감에 본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제 생활 속에 KBS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KBS라는 배에서 내려서
미디어 환경을 바라봤습니다.
넓고 넓은 미디어의 바다에서
KBS는 크고 튼튼한 배였지만
쉽게 찾게 되지 않는 방송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웠고,
너무 무거웠습니다.
시청자가 듣고 싶은 내용을 말해주기보다
본인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을 때에는 그 편안함과 안정감이 좋았지만
밖에서 바라보니 그 편안함은
시청자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KBS 프로그램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 생활 속에 KBS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니, KBS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다른 배들과는 달리 움직임은 둔 해 보였고
군데군데 어울리지 않는 꾸밈도 보였습니다.
배의 크기 자체는 크고 웅장했지만
시청자 눈에는 잘 띄지 않았습니다.
KBS라는 배는 크고 웅장했지만
그 큰 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디어의 바다가 커졌고
작고 빠르며 시청자와 가까운 배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동시에 시청자의 시선은 더 많은 배들로 흩어졌습니다.
육아 휴직 기간 동안 좋은 기회가 닿아서
새로운 미디어 관련 스타트업과
글로벌 기업들의 뉴미디어 관련 세미나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과 강의를 들었고,
팟캐스트 방송에도 출연도 하고
개인적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전혀 다른 미디어를 만나고 만들어봤습니다.
뉴미디어 시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들은
KBS라는 편안한 배 안에서는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고민하고 있더군요.
이미 그들에게 KBS는 라이벌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넘어야 하는 목표도 아니었습니다.
KBS가 크고 튼튼한 배임을 강조하는 사이,
그들은 얼마나 더 빠르고, 성장하고
시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더군요.
그들이 하고 싶은 얘기보다
시청자가 원하는 얘기, 듣고 싶은 방식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KBS 안에서 고민하는 것들은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더군요.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주 가까이에서 그들의 성장을 바라봤습니다.
'오프 더 레코드'로 알게 된 프로젝트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을 옆에서 보며
그들의 시선과 목표가
더 이상 KBS에 생각한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가끔 바라본 KBS.
KBS는 여전히 크고 튼튼했지만,
새로운 미디어가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KBS는 계속 그 자리에 있더군요.
아니, 어쩌면 조금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밖에서 보는 KBS는 가라앉는 아주 좋은 배, 타이타닉 같았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얘기보다
시청자가 원하는 얘기, 듣고 싶은 방식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KBS 안에서 고민하는 것들은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더군요.
육아휴직을 마치고
원래 있던 크고 웅장한 배, KBS에 돌아왔습니다.
같은 자리로 돌아왔지만 느낌은 달랐습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1등석에서는 볼 수 없던,
3등석의 유리창에는 바닷속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력도 부족하고 환경도 나빠지고 있습니다.
10년째 막내.
투자가 없으니 성과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방송 자체가 줄어들고 있죠.
기회조차 사라지는,
그야말로 창밖으로 바닷속이 보이는 현실입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1등석 갑판에서 바라본 미디어의 바다.
예전에 저 멀리 보이던 작은 배들이
이제는 더 크고 화려한 배로 진화했습니다.
이미 KBS를 앞지른 배들도 보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는 배도 보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길을 멋지게 개척하는 배들도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개인인 것 같지만
영향력이 큰 배들도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쉽게 배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네요.
KBS가 아주아주 좋은 배임에는 틀림없지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 시기, KBS 내부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에서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나긴 싸움을 마치고 돌아와,
KBS 안에도 아주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시작됐습니다.
그 작은 시작에 함께 뛰어들었습니다.
변화를 위한 시작.
완전한 변화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머물러 있다가는 가라앉고 말 게 뻔하니까요.
이제는,
‘나 퇴직할 때까지는 끄떡없다’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요.
밖에서 보는 KBS는 가라앉는 아주 좋은 배,
타이타닉 같았습니다.